우리나라의 이름난 장수로는 먼저 충무공(이순신)을 꼽지만, 군졸로 천하에 이름을 알린 사람은 이사룡(李士龍) 뿐일 것이다. 이사룡은 성주 사람으로 일찍이 군적에 편입되었고, 적의 요구에 응하게 되면서 금주(錦州)로 갔다. 명나라의 장수 조대수(祖大壽)와 맞서게 되었는데, 포탄을 빼고 공포를 쏘다가 적에게 발각되었다. 여러 차례 칼을 맞았으나 두려워하지 않았고, 세 번이나 이렇게 하다가 마침내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명나라 장수가 첩보를 통해 이를 알고는 장대 끝에다 특별히 ‘조선의사 이사룡(朝鮮義士 李士龍)’이라 써서 걸었다.
아아, 신사년(1641)의 전투에서 만약 이사룡의 행동이 없었다면 장차 후세에 무슨 할 말이 있었겠는가? 예전에 당나라 위사(衛士)가 순절한 것을 주 부자(朱夫子, 주자)가 표창해 주었는데, 하물며 작은 나라(조선)의 군졸이 명나라를 위해 의리를 지키고 용맹함을 보여 우뚝하니 우리나라의 밝은 빛이 되었으니 더 말할 것이 없겠다. 그러나 신분이 미천하여 아직까지 그를 표창하는 조치를 하지 못했으니, 어찌 풍속을 만들고 법도로 나아가게 하는 의리이겠는가? 성주의 포수 이사룡에게 특별히 성주목사를 증직하고, 지방관에게 그의 마을에 정표(旌表)하도록 하라. 그의 후손 가운데 벼슬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즉시 군문(軍門)에 등용하고 보고하도록 하라.
1793년(정조 17)에 정조가 작성한 글인데, 원래의 제목은 ‘성주 포수 이사룡에게 증직하고 마을에 정표하는 교서(星州 手李士龍贈職旌里敎)’이다. 이사룡은 경상도 성주 사람으로 수문장을 지낸 이유문의 손자이다. 1640년(인조 18)에 청나라는 명나라를 공격해 들어가면서 조선에 구원병을 보낼 것을 요청했다. 이는 조선과 청이 병자호란을 끝내면서 맺은 조약을 따른 것이므로 조선 정부로서는 구원병을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이사룡은 포수 출신으로 중국 땅에서 벌어진 국제전쟁에 참여했다.
조선의 구원병은 금주(錦州)에서 조대수가 이끄는 명나라 부대와 맞붙었는데, 이사룡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한 은인의 나라인 명나라와는 싸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그는 대포를 쏠 때 포탄을 넣지 않은 채 공포를 쏘았고, 청의 감시병에게 이 사실이 발각되어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이사룡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주장하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은 군령을 어긴 죄로 사형되었다.
이사룡이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다 죽었다는 소식은 첩자를 통해 조대수 군에 알려졌는데, 조대수는 ‘조선의사 이사룡’이라고 크게 쓴 깃발을 내걸어 자기 부대의 사기를 높였다. 이사룡에 관한 소식은 청 태종에게도 알려졌는데, 태종은 북경을 함락시킨 이듬해(1645)에 인질로 있던 소현세자를 조선으로 돌려보내면서 이사룡의 시신도 가져가도록 했다. 이사룡의 시신이 돌아오자, 인조는 이를 고향인 성주에 장사지내게 하고, 그 자손에게는 면세의 혜택을 주고 음식물을 하사했다.
정조는 조선이 청을 위한 구원병을 파견한 것은 명나라 입장에서 보면 배은망덕한 일이라 할 수 있는데, 이사룡의 순절이 있었기에 그나마 조선의 체면이 살게 된 것으로 평가했다. 정조는 이사룡의 행적을 표창하기 위해 그에게 성주목사란 관직을 주었고, 그의 후손 가운데 세 사람을 선발하여 군관으로 임명했다. 또한 1795년에는 이사룡의 사당인 충렬사(忠烈祠)의 현판 글씨를 써 주었고, 경상감사에게 그를 위한 제사를 지내주라고 명령했다. 정조는 일개 군졸에 불과한 이사룡의 행적을 크게 표창했는데, 자신의 백성들도 그를 본받아 국가를 위해 의리와 충절을 지키게 되기를 기대한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