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인이 역대 선왕들의 큰 사업을 계승하여, 밤낮으로 두려워하기를 깊은 못을 건너거나 얇은 살얼음을 밟듯이 두려워한 것이 이제 3년이 되었다. 우리 영종대왕(영조)의 부묘( 廟) 의식이 끝나고 예제가 길례(吉禮)가 되었으므로, 곤복(袞服)과 면류관을 갖춰 입고 악기를 설치한 후 태묘(종묘)에 참배하고 신하들의 축하인사를 받게 되었으니, 이는 선왕의 예제다. 나 소자는 선왕의 자리에 올라 선왕의 백성들을 대하면서 감히 선왕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하고 선왕의 정치를 나의 정치로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처음 만나는 모임에 임금과 신하,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노력하는 도리에 힘써야 할 것이므로 대궐의 뜰에서 크게 고한다. 그 조목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백성의 산업, 인재, 군대 업무, 재정이 그것이다.(중략)
총괄하여 말하자면 오늘날의 폐단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비유하자면 큰 병을 앓는 사람이 원기가 허약해지고 혈맥이 막히며 혹이 솟아오른 것과 같다. 기강이 문란하여 임금이 높여지지 않고, 언로가 막혀 올바른 말이 들리지 않으며, 역적이 잇달아 나와 의리가 어두워지는 등 위태로운 증상이 눈앞에 닥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도 지금 네 가지 조목만을 거론한 것은 국가의 근본을 굳건히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근본을 굳건히 하는 것은 백성에게 달려 있으며, 백성을 기르는 것은 먹을 것에 달려 있다. 먹을 것이 풍족하면 가르칠 수 있고 가르친 후에는 반드시 경계하고 보호하며 도와주고 보태주어야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나라를 보호하는 근본이다.
1778년 정조가 처음으로 조참(朝參)을 거행할 때 발표한 윤음으로, 원 제목은‘초원조참일윤음(初元朝參日綸音)’이다. 여기서‘조참’이란 오늘날의 조회를 말하는데, 조선시대의 궁궐에서는 매월 네 차례의 조참을 거행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1776년에 국왕이 된 정조가 삼년 동안이나 조회를 하지 않은 것은 선왕인 영조의 삼년상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윗글을 보면‘정조가 영조를 부묘하고 태묘(종묘)에 참배
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서 ‘부묘’란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창덕궁에 모셨던 영조의 신주를 종묘로 옮겨서 모시는 행사를 말한다. 정조는 영조의 삼년상을 끝내고 나서 국왕으로서의 업무를 본격적으로 수
행하기 시작했다.
이글에서 정조는 먼저 선왕인 영조의 사업을 계승하겠다고 다짐한다. 자신이 선왕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 선왕이 다스렸던 백성들을 다스리게 되었으므로, 선왕의 마음과 정치를 계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정조의 정치는 그저 영조의 정치를 답습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정조는 조회에 참석한 신하들에게 자신의 통치구상을 밝혔는데, 앞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며, 국방을 튼튼히 하고,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하는데 역점을 두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정조가 파악한 당대의 현실은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모습이었다. 국가 기강이 문란해져서 국왕인 자신마저 반대파의 위협을 걱정할 정도였고, 언론이 활성화되지 않아 올바른 소리가 들려오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정조는 제일 먼저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걱정했다. 백성들의 생활이 풍족해져야 민심이 안정될 것이고, 그런 백성들을 제대로 가르쳐야 국가의 기강도 바로잡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렇지만 정조는 상황이 심각해진 이유가 자신의 뜻이 확고하지 않고 학문이 성취되지 않아서라 하여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고, 신하들에게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제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윤음을 발표할 당시 정조의 나이는 불과 27세였다. 20대의 젊은 군주였지만 그는 조선이 가진 문제점과 책임 소재, 문제를 해결할 순서까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 글에서 정조가 보여준 바람직한 지도자상이란‘책임감과 명민함을 갖춘 지도자’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