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초 국제원유가 폭등 후 세계 금융위기 도래, 금융대란 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오일쇼크 석유는 단순한 연료이름이 아니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세계경제를 주무르는 핵심중의 핵심요소이다. 석유의 위력은 세계경제에서 그 영향력과 비중이 기축통화인 달러에 버금가게 막강하다.
중동 산유국으로 엄청난 양의 검은 달러가 흘러들어 가면서 황금알을 낳은 「오일달러」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1970년대 두 차례에 걸쳐 산업기지를 강타한 오일쇼크는 전 세계를 두려움으로 들끓게 하였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석유 소비량도 급증하고 석유판매가 늘어났지만 중동 산유국들은 큰 재미를 보지 못하였다. 석유관련 시설을 대부분 메이저 업체들에게 넘겨주고 이용료만을 받았기 때문이다.
1967년 발발한 제3차중동전에서 Egypt를 비롯한 요르단과 시리아 등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에게 참패를 당한다. 심지어 이슬람 성지를 빼앗기는 씻을 수 없는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보복의 칼날이 1973년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아랍권이 일으킨 전쟁, 이게 바로 제4차 중동전이다. 제4차 중동전은 중동의 정치뿐 아니라 세계경제에도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제4차 중동전쟁으로 제1차 오일쇼크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1973년 10월6일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 초반에는 아랍 국가들이 그 주도권을 잡는 듯 하였으나 신예무기와 강력한 국방력을 과시한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지원하면서 전세는 하루아침에 역전의 새날을 맞게 된다.
석유판매에 불만을 갖고 있던 석유수출국기구(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중동 6개 산유국 석유상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석유의 무기화」라는 초강수로 맞서게 된다. 전쟁 발발 10일 뒤인 1973년 10월 16일 석유수출가격을 하루아침에 17% 올리기로 합의하고, 다음날인 17일에는 이스라엘이 제3차 중동전쟁을 통해 빼앗은 땅에서 철수하기 전까지 매달 5%씩 석유를 감산하고 이스라엘을 지원한 미국과 친 이스라엘 국가들에 대해 석유수출을 전면 금지한다는 결의안을 발표하며 자원의 안보화와 「자원의 무기화」를 들고 나오면서 제1차 오일쇼크가 된다.
중동 산유국들은 3개월 동안 유가를 무려 네 배나 인상함에 따라 전 세계 경제에 크나큰 충격을 던지게 된다. 따라서 세계 각국의 물가가 천정부지 치솟으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무역거래가 급감하고 경제성장률도 폭락하는 등 세계는 심각한 경제위기를 맞게 된다. 제1차 오일쇼크를 통해 중동의 산유국들은 석유생산시설을 국유화하고 석유 메이저들이 가지고 있던 가격결정권을 빼앗아 독점하게 된다.
하지만 산유국들은 별로 재미를 보지 못하였다. 국제적인 인플레이션으로 달러가치의 하락을 불러오고 유가인상으로 소비가 줄어들면서 세계 유가도 다시 안정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1978년 이란의 국내정치문제로 촉발한 정치적 불안이 제2차 오일쇼크의 도화선이 된다. 이란 팔레비(Pahalvi)왕정이 붕괴되고 호메이니(Khomeini)회교정권이 탄생하는 정치적 혼란을 겪으면서 석유수출이 전면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게 된다. 당시 이란은 전 세계 석유생산량의 15%를 차지하는 세계 제2의 산유국이다.
석유 소비국들은 제1차 오일쇼크의 악몽으로 앞 다투어 석유의 재고확보에 나서게 된다. 중동 산유국들은 다시 힘을 모아 유가를 올리기 시작한다. 제1차 오일쇼크 때와 달리 장기적으로 꾸준히 올리기 시작한 유가는 1978년에 B/L당 13달러 선에서 1981년 2년 반 만에 3배 가까운 34달러 선까지 육박하기에 이른다. 어김없이 세계경제는 경기침체와 물가상승, 경제성장률 둔화라는 암울한 상황을 맞게 된다.
2008년 초 국제원유가의 폭등으로 제3차 오일쇼크 직전까지(B/L당 200달러를 예견)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세계 금융위기 여파로 다소 주춤하고 있지만 언제 또다시 터져 나올지 알 수 없는 휴화산처럼 두려운 존재다. 석유 한 방울 생산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세계 금융대란보다 더 무서운 복병이 다름아닌 오일쇼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