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젖은 제국의 수도(下)
비에 젖은 제국의 수도(下)
  • 장두식(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09.09.22 17:47
  • 호수 12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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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든 것들은 모두 초원 속으로 사라질 뿐이다

이상했다. 하라호름에 올 때마다 비가 내린다. 사막국가로 분류되는 몽골에서 이렇게 쉽게 비를 만나다니.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면 야생화가 온 초원을 가득 채울 텐데. 언젠가 허흐노르(푸른호수)를 다녀온 사람들이 내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었다. 정말 지평선 끝까지 야생화가 만발했더군요. 바람이 불 때마다 꽃들이 흔들리는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꽃사태라는 말을 실감했어요. 눈길 가는 데마다 노란색 언덕, 보라색 벌판, 연분홍 계곡이 펼쳐지더군요. 정말 환상이었어. 꼭 가보세요. 전화를 받고 난 후 가끔씩 나는 꿈속에서 보라색 야생화들이 온 세상을 채우고 있는 장관을 만나곤 했다. 다음 해 여름 당연히 몽골로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올란바타르에서 동으로 동으로 몇시간을 달렸을까? 두 개의 호수가 붙어있는 모양의 허흐노르가 나타났다. 그런데 호수를 감싸고 피어 있다던 그 많은 야생화는 다 어디로 갔을까? 어워가 있는 높은 구릉으로 올라가 사방을 살펴보아도 꽃이 없었다. 온 초원에 꽃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올해는 비가 안와서 꽃이 금방 떨어졌다는 말에  가슴 속에 텅 비어 버렸다. 에르덴조 사원 처마 밑에서 비를 긋다가 꽃을 생각하다니. 세상의 꽃들은 모두 보살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데.  


오르혼강 유역의 하라호름은 칭키스한의 후계자인 오고타이한에 의해 수도가 건설 된 후 20여년간 세계의 중심이었다. 몽골의 기마병의 침입에 의해서 유럽 안 개구리였던 서양인들이 세계라는 개념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하라호름은 몽골대제국의 수도이자 명실상부한 세계의 심장이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하라호름은 글로발리제이션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몽골의 역사는 하라호름이란 도시를 초원으로 덮어 버렸다. 유라시아의 외교사절들과 상인들이 북적대던 세계의 수도 하라호름은 쿠빌라이한이 대도(북경)로 천도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다가 원제국 멸망 후 말을 탄 자들은 도시를 떠났고, 낙타를 탄 자들도 도시를 떠났고, 걸을 수 있는 자들도 모두 떠나 버리고 텅비어 버렸다. 인간들이 떠난 빈자리는 자연스럽게 연초록 풀들과 야생화들이 덮이기 시작하였다. 잠시 북원의 수도가 되었다가 하라호름은 에르덴조 사원만 남기고 아주 푸른 초원이 되었다. 초원의 역사는 무정(無情)하지도 유정(有情)하지도 않다. 인간이 만든 것들은 모두 초원 속으로 사라질 뿐이다.
물리적 정복제국의 수도에서 정신적 불교사원으로의 의미 있는 전이(轉移)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극한 영화를 누리던 속세의 공간에서 금욕을 앞세우는 내세적인 공간으로의 변신은 허무했다. 현재 에르덴조 사원에는 20여명의 라마만이 거주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 허무감이 더욱 커졌다. 
비가 조금 잦아들고 있었다. 저 멀리서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몽골에서 만나는 비 치고는 너무 많이 내렸다. 저 멀리 파란 하딱에 쌓인 석탑이 보였다. 여기저기 주춧돌이나 궁전의 석재로 썼음직한 돌무더기들도 보였다. 모두들 젖고 있었다. 비가 오면 젖을 것은 젖어야 하지만 비가 개면 마를 것은 빨리 마를 것이다. 하지만 800여년이란 시간을 담고 있는 에르덴조 사원은 빨리 마를 것 같지 않았다. 후르트(마니차)를 돌리며 여기에 있는 것들과 저기에 있는 것들 그리고 이 세상에 없는 것들과 저 세상에 있는 것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겠다. 칭키스한의 황금시대는 사라졌지만 에르데니조 사원의 날렵한 처마들은 모두 하늘을 향해 퍼덕이고 있는 것 같았다. 저 멀리서 맑은 챙-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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