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오도답파여행]⑦ 해지는 강경에서
[신오도답파여행]⑦ 해지는 강경에서
  • 김재관(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1.05.18 20:55
  • 호수 1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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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로에 길을 내어준 ‘강경포구’

  백제교 남쪽에 있는 ‘규암진’은 ‘구드래 나루’와 함께 부여를 대표하는 강항(江港)이었다. 그렇지만 철도와 신작로가 부설되면서 금강 수운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호남선이 개통되고, 1931년 장항선까지 개통되면서 금강으로 오가던 물류는 급격하게 줄어든다. 화물이 줄면서 금강의 나루들도 하나 둘 사라졌다. 이 과정에서 ‘규암진’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1968년 ‘백제교’가 개통되기 이전까지 이곳에서 배를 타고 ‘구드래 나루’를 오갔다. 옛날과 같은 규모는 아니었지만 백마강의 동쪽과 서쪽을 배로 건너야 했기 때문에 나루의 기능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백마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부설되면서 ‘규암진’과 ‘구드래 나루’의 위상은 더욱 약화되었다. 지금도 낙화암을 오가는 유람선의 선착장이 있어 이곳이 나루의 입지를 갖추었던 곳임을 생각하게 한다.


  이곳을 좀 더 살펴볼 요량으로 ‘자온대(自溫臺)’ 위에 있는 ‘수북정(水北亭)’으로 갔다. 정자에 오르니 부여읍과 백마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부여를 휘돌아 흐르는 백마강의 동쪽과 서쪽으로 펼쳐진 평야가 보인다. 비닐온실 지붕이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을 보니 이곳이 풍요로운 땅임을 실감하게 한다. 천혜의 입지로 수도를 옮긴 백제는 이곳에서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다. 이광수가 “百濟의 商船과 兵艦이 떠났던 데요. 唐, 日本, 安南의 商船이 各色 物化를 滿載하고 輻湊하던 데”라고 이곳을 회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부여’에서 난 생산물들은 이곳 나루에서 다른 지역의 물산과 교환되었을 것이다. 서해에서 금강을 거슬러 올라온 배들과 ‘부강’에서 내려온 배들이 기착(寄着)하면서 붐비었을 ‘규암진’의 영광을 떠올리며 ‘강경’으로 발길을 돌렸다.       


  해 넘어가는 강경포구의 모습을 담고 싶은 마음에 차량의 속도를 높였다. 역광을 받아 갈색 빛을 반짝이는 논산천의 갈대는 아직 겨울의 끝임을 알려주고 있다. 해넘이까지 약간 여유가 있어 ‘강경역’으로 갔다. ‘부여’에서 작은 배를 타고 ‘강경’에 온 이광수는 이곳에서 다섯 시간 정도 머물다 호남선을 타고 ‘군산(群山)’으로 갔다. ‘강경’은 ‘대구(大邱)’, ‘평양(平壤)’과 더불어 조선후기 삼대 시장으로 꼽혔던 곳이었지만, 이미 그가 방문했을 무렵에는 서서히 그 위상을 잃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다른 곳과 달리 “江景서 約五時間을 머물러 午後 八時半車로 群山을 向하다”라고만 적는다. ‘강경’의 몰락은 호남선과 지선인 군산선이 개통되면서 예고된 것이었다. 경부선과 호남선이 교차했던 ‘대전(大田)’과 서해의 주요 항구가 된 ‘군산’에 밀려 ‘강경’은 서서히 몰락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이광수에게 ‘강경’은 ‘군산’으로 가는 중간 기착지에 불과했다.   

▲ 강경포구를 드나들던 어선.

  1917년 이광수가 이곳을 찾았을 당시 ‘강경포구’는 여전히 북적였지만, 금강 하류에 있는  ‘군산’에 시장의 주도권을 뺏긴 상태였다. 1918년 ‘강경’의 1년 총 거래액은 조선의 시장들 중에서 16위로 떨어지는데, 이는 시장 규모가 예전과 같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1904년 경부선이 개통되기 이전까지 ‘군산항’을 통해 수입되었던 잡화의 80% 이상은 ‘강경’을 통해 들고 났다. 그렇지만 경부선이 금강 상류의 ‘부강’을 통과하면서 수입물품의 거래 규모도 줄어들게 된다. ‘부산’과 ‘인천’을 통해 수입된 물품들은 ‘부강’에서 내려졌고, 충남 내륙으로 운송되었다. 근대 교통망과 연계된 지역들에 주도권을 뺏기면서 ‘강경시장’은 예전과 같은 위상을 유지할 수 없었으며, 1912년 군산선과 1914년 호남선까지 개통되면서 금강 내륙 수운의 중심항이었던 지위도 잃게 되었다. 서해와 충남북은 물론 전북 내륙을 연결하는 수운교통의 요지였던  ‘강경포구’의 쇠퇴는 금강 수운의 종말을 알리는 것이었다. 또한 근대 교통수단에 주인공 자리를 빼앗긴 조선 재래 교통수단의 현실을 알려주는 것이자, 외세로 상징되는 근대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광수가 ‘강경’을 찾았을 때, 이런 상황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었다. 그는 ‘부여’의 ‘규암진(窺岩津)’에서 작은 목선을 타고 이곳으로 왔는데, 조선의 쇠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들과 같이 한다. 퉁소(洞蕭로 표기하고 있으나 잘못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부는 소경 노총각, 해금 긋는 백발 파립의 노인, 이팔이 넘었을 것 같은 담장 소복을 입은 여인 등은 그가 지향했던 문명인의 형상은 아니었다. 그는 이들에게 애련한 마음을 느꼈는지 이들이 부른 노래를 옮겨 적고 있다. 이미 다른 글들에서 문명화의 흐름에 동참하지 못하는 자들을 강하게 질타했던 그였지만 이것도 조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해지기 전에 도착한 ‘강경’에서 이광수가 걸었던 경로와는 반대로 움직였다. 먼저 강경역부터 둘러보고 번성했던 ‘강경포구’로 갔다. 이미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다. 포구가 있었던 자리는 황량했다. 겨울의 끝을 알리는 북서풍이 매섭게 불었다. 강경 포구에 배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던 시절에는 등대(燈臺)도 있었다. 바다도 아닌 강항에 등대가 있었을 정도이니 당시 강경포구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야간에 금강을 오가는 배들의 안전운항을 위해 1915년 세웠던 이 등대는 강경이 포구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철거되었다. 2008년 강경젓갈 축제의 일환으로 복원되었지만 배도 다니지 않는 포구에 서 있는 등대는 왠지 어색했다. 배 모양으로 만든 ‘강경젓갈전시관’ 주위로 강경포구를 드나들던 어선들을 전시해 놓았는데, 석양빛을 받고 서 있는 모습이 근대 강경의 역사를 담고 있는 느낌을 준다. 

▲ 강경포구아 얼마나 분주했는가를 보여주는 등대.

  황산대교 너머로 해 저무는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반짝이는 황금물빛에 취해 몸속까지 파고든 추위도 잊고 있었다. 바다도 아닌 곳에서 저녁바다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니……. 광각렌즈가 없어 저녁 해 지는 황산대교의 풍광을 담지 못해 아쉬웠지만, 마음과 눈으로 충분히 호강을 누렸던 터라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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