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유학생들의 ‘2 ‧ 8 독립선언’
동경유학생들의 ‘2 ‧ 8 독립선언’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2.01.30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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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유학생들의 ‘2 ‧ 8 독립선언’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오는 2월 8일은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가 동경(東京)에서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을 발족하고,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날이다. 지금으로부터 93년 전의 일이다. 우리는 이를 ‘2 ‧ 8 독립선언’이라 이름하였다.


敵都에서 펼친 大韓靑年들의 氣槪


젊은 피, 끓는 가슴! 우리의 젊은 동경 유학생들은 모두 선구자적(先驅者的)인 애국 ‧ 애족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 T. W.)의 「평화안 14개조(The Fourteen Points)」에 담고 있는 약소민족의 해방을 약속하는 ‘민족자결원칙’(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은 당시 동경 유학생들에게 암흑에서 광명의 불빛을 보게 하는 기쁨이었다.

조국애(祖國愛)에 불타고 있던 유학생들은 이 민족자결원칙을 우리 조국광복의 기회로 삼았다. 영자신문「재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에 보도된 “미국에 거주하는 이승만 ‧ 민찬호 ‧ 정한경 3인이 한국의 민족대표로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다”는 기사는 유학생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이 기사를 접한 유학생들은 민족자결의 원칙에 입각한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자신들이 앞장 서서 투쟁하여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였다. 그들은 이에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1919년 1월 8일, 조선유학생학우회는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최팔용(崔八鏞) ‧ 전영택(田榮澤) 등 학생대표 10명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이광수(李光洙)로 하여금 ‘조선청년독립단 선언서’와 ‘결의문’을 작성케 하였다.

1919년 2월 8일! 긴장과 흥분 속에서 그날이 밝았다. 오후 2시 정각,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청년독립단 발족대회의 막이 올랐다. 대회장에는 입추의 여지 없이 600여명의 일본 유학생들이 운집한 가운데 개회가 선언되었다. 여기서 최팔용이 역사적인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하고, 백관수(白寬洙)가 감격과 흥분에 찬 목소리로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그리고, 김도연(金度演)의 결의문 낭독이 이어졌다.

“전항의 요구가 실패될 때에는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의 혈전(血戰)을 선포한다. 이로써 발생하는 참화(慘禍)는 우리 민족이 그 책(責)에 임(任)하지 않는다”는 결의문 낭독이 끝나자 침묵 속에 이를 지켜보고 있던 남녀 600여명의 유학생들은 우래같은 박수로 화답하였다. 그리고, 일본 국회에 보낼 한국독립청원서(韓國獨立請願書)를 만장일치로 가결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어디 그뿐이었던가. 서로 부둥켜안고 감격하고, 흥분을 참지 못해 울부짖기도 하였다. 나라 잃은 설움이 붇바쳐 올랐으리라.

이 날의 ‘2 ‧ 8 독립선언’은 일본의 수도인 동경, 적도(敵都) 한 복판에서 개최된 것이어서 그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선언은 한국민족이 유구한 역사를 이어오고 있으며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 민족임을 강조하고, 일본 침략의 부당성과 독립의 당위성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우리 민족의 기개(氣槪)를 세계만방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얼마나 통쾌하고 자랑스러운가. ‘2 ‧ 8 독립선언’! 우리 젊은 유학생들의 철두철미한 민족주의(民族主義) 정신에 입각한 참으로 비장한 결의였다. 패기와 열정, 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그들은 단지 유학생들이 아니었다. 우리 2천만 민족의 대표자였다. 참으로 거룩한 정의(正義)와 자유(自由)의 화신(化身)들이었다.


己未獨立宣言의 導火線 되다


동경유학생들의 2 ‧ 8 독립선언은 한국의 독립을 열망하는 민족지도자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1인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고, ‘2 ‧ 8 독립선언’의 의미를 더 널리 알리기 위해 재일본(在日本) 각국 대사관, 일본 정부와 국회에 독립선언서를 보냈다. 그뿐이 아니었다. 영어로 번역된 선언서를 파리에 있는 윌슨 ‧ 끄레망소 ‧ 로이드 조오지 등에게도 보냈다. 그리고, 이 운동을 거족적으로 확산시켜나가기 위하여 송계백(宋繼白)을 국내로, 이광수를 상해(上海)로 파견하여 독립투사들과 접촉하게 하였다.

또, 상해에서 발행되는 영국계 「데일리 뉴스」(The Daily News) 평론란에는 “한국청년의 열망”(Young Korea‘s Ambition)이라는 제목으로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 기사가 나간 그 다음 날에는 「차이나 프레스」(The China Press)에도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에 관한 기사가 자세히 보도되어 세계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는 상해에 머물고 있는 이광수의 노력의 결과였다.

유학생들의 이러한 노력은 기미독립선언으로 열매 맺게 된다. 조선청년독립단의 2 ‧ 8 독립선언이 있은 날로부터 20여일 후 손병희(孫秉熙) 등 민족대표 33인이 서울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和館)에서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가 낭독된다. 그리고, 이 날의 대한독립만세 3창은 독립의 불길을 3천리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게 했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평등의 대의(大義)를 극명하며, 차(此)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民族自存)의 정권(正權)을 영유케 하노라. ‧ ‧ ‧”

 이는 기미독립선언서의 일부이다. 이것은 우리 2천만 동포의 가슴 가슴에 맺혀 분연히 일어나게 한 절규였다. 인류역사에 새 문명의 열림을 알리는 우리 민족의 기개였다. 참으로 자랑스럽지 않는가.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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