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또오(齋藤)의 馬車에 폭탄을 던지다
사이또오(齋藤)의 馬車에 폭탄을 던지다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2.08.13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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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또오(齋藤)의 馬車에 폭탄을 던지다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오는 9월 2일은 강우규(姜宇奎) 의사(義士)가 제3대 조선총독(朝鮮總督)으로 부임해오는 사이또오 마코토(齋藤 實)에게 폭탄을 던진 날이다. 그로부터 93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날에 그 목적은 이루지 못하고, 일본 관헌 37명에게 중경상을 입히는 데 그쳤다. 그러나, 이로써 일본의 만행에 강한 경고를 보낸 것이며,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僑胞 子弟들에게 抗日思想 고취하다

 

    강우규. 그는 1859년 6월 5일, 평안남도 덕천군(德川郡) 무릉면(武陵面)에서 빈농(貧農)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총명스러움을 인정받았는데, 그의 친형에게서 한학(漢學)을 공부하면서 한방의술(韓方醫術)을 전수받아 한약방을 경영하였다.

    그렇게 생업을 이어가면서 그날 그날을 보내고 있는 그에게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李東輝) 집안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 구국운동(救國運動)에 입문하게 된다.

    그는 한약방을 경영하면서 모은 돈으로 함경남도 홍원군(洪原郡) 홍원읍내에 학교를 세우고, 교육구국(敎育救國)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탄함으로써 그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만다.

    그러나, 이것은 그로 하여금 조국의 독립을 위한 또 다른 길을 선택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는 1911년 봄 만주(滿洲)로 건너가 연해주(沿海州)를 오가면서 박은식(朴殷植) ‧ 이동휘 등과 접촉, 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하게 된다. 그러던 그는 길림성(吉林省) 요하현(饒河縣)으로 이주,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하고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워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民族意識)을 심는 교육사업에 진력하게 된다. 한편, 이 곳에서 교회도 세워 한인동포(韓人同胞)들을 모아 같은 민족으로서의 일체감을 갖게 하였다. 이로써 이 곳은 새로운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된다.

    그러던 중, 1919년 3 ‧ 1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소식이 국외(國外)의 동포사회에까지 전해지게 되고, 이로써 우리 동포가 거주하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만주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강우규는 벅찬 감격을 가슴에 안고, 우리 동포들을 이끌고 만세시위에 앞장섰다. 이로써 이 곳 신흥촌에 4천5백명의 만세함성이 울러퍼졌다.

 

    사이또오를 처단하기로 결심하다

 

    강우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 때야 말로 자기 한 몸을 조국을 위해 바칠 기회로 삼고, 만주 등지에서 꾸준히 교유하던 박은식 ‧ 김치보(金致寶) 등과 상의, 조국에 돌아가 조선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영국제 폭탄을 몸에 품고, 일본의 감시를 피해 서울에 잠입한다. 1919년 8월 5일, 서울에 도착한 그는 새로 부임하는 사이또오 총독에 관한 정보를 수집, 기회를 엿보게 된다. 8월 28일, 남대문역 부근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역 주변의 지형지물을 조사한다. 그리고, 거사일을 기다리게 된다.

    1919년 9월 2일, 운명의 그 날이 밝았다. 남대문역은 신임 총독을 환영나온 총독부 관리를 비롯 외국사절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일본 유력인사들과 친일귀족들도 눈도장을 찍으려 몰려들었다.

    이 때, 허리에 폭탄을 차고, 두루마기 차림에 파나나 모자를 쓴 강우규가 운명의 순간을 위해 남대문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임 총독을 태운 특별열차는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사이또오 총독인들 알 리가 있었겠는가. 신임 총독에 대한 환영행사가 끝나고, 총독을 태운 쌍두마차는 인파를 헤치고 총독관저를 향해 출발했다. 이 때를 놓칠 리가 있었겠는가. 드디어 강우규는 일제(日帝)를 향한 분노를 담아 힘껏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무서운 폭음을 내며 폭발했다. 천지를 진동시켰다. 군중들도, 관헌들도 모두 놀랐다.

    그런데, 아, 슬프도다! 참으로 안타깝도다! 민족의 원수, 사이또오를 꺼꾸러뜨리지 못했구나. 조무래기 37명만을 다치게 했으니, 얼마나 원통하였을까. 그러나, 그는 여기서 머뭇거리지 않았다. 실패의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두 번째의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이든가. 의거(義擧) 16일만인 9월 17일, 일제의 앞잡이 김태석(金泰錫)에게 체포되고 만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당당했다. 법정(法廷)에 임하는 그의 태도는 일본인 재판관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 죽일 놈들아, 피고인(被告人)라니!”라고 호통치며, 자신의 의거(義擧)가 ‘정의(正義)의 실천’이라고 부르짖었다. 대한남아(大韓男兒)의 기상(氣相)에 그들은 놀랐으리라.

    그에게 사형(死刑)이 확정되었지만,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함 없이 담담한 모습으로 사형집행의 그 날을 기다렸다. 죽음 따위는 그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오직 조국의 독립이 그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 형장(刑場)에서 그가 남긴 마지막 절규(絶叫)가 우리의 가슴에 아리게 와닿는다. “단두대(斷頭臺) 위에 올라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이것이 우리 2천만 동포의 목소리요, 울부짖음이었다. 이 피맺힌 절규 앞에 숨을 죽이지 않은 자 누가 있었겠는가.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dknew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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