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陽 定都의 주역, 鄭道傳
漢陽 定都의 주역, 鄭道傳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3.05.06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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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 定都의 주역, 鄭道傳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1392년 7월 17일. 이 날 이성계(李成桂)는 개경(開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식(卽位式)을 거행하고, 새로운 왕조(王朝)를 건국하였다. 이로써 고려왕조(高麗王朝) 475년의 막이 내렸다.

     1388년(高麗 禑王 14년) 5월 22일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이성계 일파가 정치적 ‧ 군사적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새 왕조(王朝) 창업의 기운을 잡게 되었다. 이 때, 이성계의 좌 ‧ 우에 조 준(趙浚)과 정도전(鄭道傳)이 자리하고 있었다.

    새 王朝의 創業에 앞장서다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 이성계 일파는 당시의 가장 큰 사회문제였던 토지제도를 바로잡는 일이었다. 이를 통해서 부패하고 타락한 통치질서를 재정비하려고 하였다.

     고려말 농민들은 토지를 경작하여 생산량의 10분의 1을 국가에 조세(租稅)로 납부하였는데, 국가는 그 조세를 거두어들이는 권한을 관리들에게 나누어주고 있었다. 이것을 수조권(收租權)이라고 하였는데, 관직(官職)에서 물러나면 당연히 그 권한을 국가에 반납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수조권을 행사하는 것은 법을 어기는 일이었지만, 그것이 관행처럼 행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수조권이 사사로이 자손들에게 대물림되었다.

     그 결과, 한 토지에 수조권을 행사하는 사람이 여러 명으로 늘어나기도 하고, 이로써 농민들의 생활은 점점 궁핍해져만 갔다. 농민들의 이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면서 권문세족(權門勢族)에 대한 저항이 나날이 늘어났다.

    이 때,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들이 권문세족들의 횡포에 의한 토지개혁에 착수했다. 그 중심에 조 준이 있었다. 조 준의 개혁은 그 동안 묵인되어 오던 수조권의 중복을 없애고, 새로운 토지제도를 만들어 현직 관리들에게 수조권을 재분배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개혁은 쉽지만 않았다. 권문세족들이 조상 대대로 누리던 사전(私田)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는 만난을 무릅쓰고 개혁을 단행하려고 했다. 이것이 위민(爲民)을 실현하려는 첫 단계였다. 이와 병행하여, 구세력들에 의하여 옹립된 창왕(昌王)을 폐하는 일이었다. 그 중심에 정도전이 있었다.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을 유포하여, 1389년 11월에 창왕을 폐하고 정창군(定昌君) 요(搖)를 옹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가 공양왕(恭讓王)이다. 그리고, 12월에는 구세력의 중심인물인 이 색(李穡)을 관직에서 파면하고, 이듬해 1월에는 조민수(曺敏修)를 유배보냈다. 또, 1392년 4월에는 이방원(李芳遠)의 부하 조영규(趙英珪)에 의하여 구세력의 최후의 보류인 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되었다.

    이로써 새 왕조의 창건에 걸림돌을 모두 제거하였다. 뿐만이 아니었다. 1391년(恭讓王 3년) 1월에는 군제(軍制)를 3군도총제(三軍都摠制)로 개혁하여 이성계가 도총제사(都摠制使)에 임명되고, 그 아래 좌군총제사(左軍摠制使)에 조 준이, 우군총제사(右軍摠制使)에 정도전이 임명되었다. 말하자면, 고려의 병권(兵權)을 이성계 ‧ 조 준 ‧ 정도전이 장악하게 된 것이다.

    정도전은 병법(兵法)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이러한 지위에 오름으로써 이성계 일파의 좌장격이 되었다. 따라서, 이성계 일파의 모든 정략은 성리학자(性理學者) 정도전의 머리에서 흘러나왔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이 새 왕조의 창건으로 이어졌다.

    漢陽 定都의 基礎를 닦다

     정도전은 조선왕조의 창건에 주도적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모든 정책을 수립함으로써 새 왕조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그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조선문감」(朝鮮文鑑) 등의 저술을 통해서 새 왕조의 정치질서를 그렸다.

     1393년(太祖 2년) 2월 15일, 새 왕조의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으로 명명하고, 5백년 역사의 거보를 내딛게 되었다. 그 중심에 정도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때, 태조는 4대 기본정책으로, 대외적으로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을, 대내적으로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표방하였으며, 사전(私田)을 혁파하고 전국의 토지를 국가에 속하게 하되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골자로 하는 토지정책을 세우고 농본주의(農本主義)에 입각한 경제정책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태조 원년 8월부터 수도(首都)를 개경(開京)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 이유의 중심에는 개경은 4백여년 고려의 수도였으므로 친원(親元)의 수구세력(守舊勢力)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이므로, 이를 청산하고 새로운 기풍을 진작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이 있는 가운데, 태조는 한양(漢陽)으로 천도(遷都)할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이에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그 이듬해 2월 태조는 백관을 거느리고 공주(公州) 계룡산(鷄龍山)을 둘러보고 이 곳에서 공사를 시작했지만, 경기좌우도(京畿左右道) 도관찰사(都觀察使) 하 윤(河崙)의 반대에 부닫친다. “도읍(都邑)은 마땅히 나라 한가운데에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계룡산의 공사를 중단하게 되었다.

     이러한 곡절 끝에 한양 천도가 결정된다. 1394년(太祖 3년) 8월의 일이다. 태조의 신임이 두텁던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이 곳은 사방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은 평연하니, 마땅히 성읍(城邑)으로 삼을 만하다”라는 의견에 따른 것이다(李瑄根 「大韓國史」 4권).

     그 해, 9월 1일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10월 28일에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선왕조 5백년의 시대가 이 곳 ‘한양’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그 중심에 정도전이 있었다. 그는 1395년 9월에 종묘(宗廟) ‧ 사직(社稷) ‧ 궁궐(宮闕)을 짓고, 윤 9월에는 북쪽의 백악(白岳), 동쪽의 낙산(駱山), 남쪽의 남산(南山), 서쪽의 인왕산(仁旺山)을 잇는 도성(都城) 5만9천5백자를 쌓았다. 그리고, 이 때 성(城) 안팎을 연락시키는 출입문으로 흥인지문(興仁之門-東大門), 숭례문(崇禮門-南大門), 돈의문(敦義門-西大門), 숙정문(肅靖門-北大門) 등의 4대문(四大門)을 지었다.

     또, 이에 앞서 1395년 6월에 한양부를 한성부(漢城府)로 개칭하고, 성 밖 10리 이내에 인접한 지역을 한성부로 편입하여 수도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로써, 한양(한성)은 조선왕조 5백년의 도읍지로서 정치 ‧ 경제 ‧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이 곳 한양이 오늘의 자랑스러운 ‘대(大)서울’로 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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