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公 申翼熙, 그의 이루지 못한 꿈
海公 申翼熙, 그의 이루지 못한 꿈
  • 권용우
  • 승인 2014.05.08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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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公 申翼熙, 그의 이루지 못한 꿈

 

권용우

(명예교수 ․ 법학)

 

1956년 5월 5일, 이 날은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대통령후보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그는 선거유세차 호남선(湖南線) 열차로 이동 중 열차내에서 심장마비(心臟痲痺)를 일으켜 이리호남병원(裡里湖南病院)으로 옮겨, 가료(加療) 중 5월 5일 새벽 5시 45분 향년 63세를 일기(一期)로 서거하였다.

 

5 ․ 15 正副統領 選擧를 치르다

 

1956년 5월 15일, 이 날은 제3대 대통령과 제4대 부통령선거가 있는 날이었다. 이 날의 정부통령선거(正副統領選擧)는 여 ․ 야(與 ․ 野) 할 것 없이 목숨을 건 일전(一戰)이었다. 여당인 자유당(自由黨)은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제한(重任制限)을 철폐한 이른바 사사오입개헌(四捨五入改憲) 후에 처음 치루는 선거이므로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것이요, 야당인 민주당(民主黨)은 여당의 변칙적인 헌법개정 후에 치루어지는 선거이므로 반드시 승리해서 정권교체(政權交替)를 달성해야 하는 숙명적인 한판이었다.

자유당은 대통령에 이승만(李承晩)을, 부통령에 이기붕(李起鵬)을 내세웠다. 자유당의 욕심은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개정된 헌법에 의하여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기붕이 부통령에 당선되면 대통령이 궐위된 때에 부통령이 대통령을 승계하여 잔여임기를 채우겠다는 속샘이었다. 연로한 이승만 대통령에게 갑자기 변고가 생겼을 경우를 대비한 단계까지 계산에 넣고 치루는 선거였다.

그리고, 민주당은 신익희와 장 면(張勉)을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내세우고, “못 살겠다 갈아보자”를 선거구호로 내걸고 필승을 다짐했다. ‘사사오입개헌’의 여파로 많은 민심이반(民心離反)이 있었기 때문에 민주당의 승리가 어느 때보다 확실한 선거였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민주당 대통령후보인 신익희가 급서(急逝)하다니. 급서의 소식을 접한 민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온 국민이 경악했다.

이제 민주당은 부통령 선거에 당력을 기울려야 했다. 선거결과는 이승만 55.7%로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가 20.5%로 민심의 향배가 자유당을 긴장케 했다. 그리고, 부통령의 경우에는 자유당의 이기붕을 누르고 민주당의 장 면이 46.4%를 득표하여 당선이 확정되었다.

대통령의 유고시에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에 이기붕이 당선되지 못하고, 민주당의 장 면이 당선된 것이 자유당에게는 큰 걸림돌이었다. 그리고, 이 번 선거결과는 이승만에 대한 지지도가 제2대 대통령 선거에 있어서보다 현저하게 떨어진 것과 여촌야도(與村野都)의 현상으로 표출된 민심이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도시지역의 경우는 교육의 수준이 농촌에 비해 월등히 높고, 매스미디어의 발달과 보급으로 인하여 정치의식이 향상된 결과였다.

 

海公 申翼熙가 걸어온 발자취

 

해공 신익희는 1894년 7월 11일(음력 6월 9일)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초월면(草月面) 서하리(西霞里)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유년시절 이 곳에서 한문(漢文)을 수학하였다.

해공이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동안에는 나라의 형세(形勢)가 참으로 어지러운 때였다. 1894년에는 일본군이 경복궁(景福宮)을 침입한 갑오변란(甲午變亂)이 있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명성왕후(明成王后)가 시해(弑害)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고 이로 말미암아 왕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公使館)으로 옮기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있게 됨으로써 앞날이 너무나 혼미하였다.

그리고,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됨으로써 우리나라는 일본에 의하여 외교권(外交權)이 박탈되고, 조선통감(朝鮮統監)에 의하여 내정간섭(內政干涉)을 받게 되었다. 나라가 있으나, 껍데기만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맞게 됨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義兵)들이 일어나 일본에 항거하게 되어 나라는 온통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그렇게 되자 일본은 경위원(警衛院)을 폐지하고, 궁문(宮門)에 일본 경찰관을 배치하였다. 이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만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러할 즈음에 해공은 서구(西歐)의 선진한 문물을 배워야 일제(日帝)로부터 국권(國權)을 되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1908년 상경하여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 영어과에 입학, 실력을 키워나갔다. 그런데, 1910년 8월 나라가 일본에 병탄(倂呑)되고 만다. 그러나,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해공은 ‘일본을 알아야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에 입학한 그는 유학생들을 결속시켜 독립운동의 전위대(前衛隊)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송진우(宋鎭禹) ․ 문일평(文一平) ․ 안재홍(安在鴻) 등과 힘을 모아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를 조직하였다. 이 때가 1912년 10월이었다. 그는 총무 ․ 회장 등의 직을 맡아서 봄 ․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웅변대회 ․ 체육대회를 개최하고, 졸업생축하회 ․ 신입생환영회를 통해서 회원간의 단결을 도모하고 조국애(祖國愛)를 배양하였다. 그리고, 학우회 회원들은 여름방학 때에는 국내로 돌아와 순회학술강연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조국의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서 국민들이 개화해야 한다는 데에 그 의미를 두었기 때문이었다. 또, 학우회의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창간, 학우회의 소식을 비롯하여 논문 ․ 시 ․ 수필 ․ 기행문 등을 게재하였다. 해공은 김병로(金炳魯) ․ 최팔용(崔八鏞)에 이어 발행인으로서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18년, 윌슨(Wilson, T. W.) 미국 대통령이 약소민족의 해방을 약속하는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를 발표하자 이를 기회로 해공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1919년 초 일본을 떠나 만주 ․ 북경 ․ 상해를 드나들며 애국지사들과 접촉하면서 독립운동의 방략을 강구해나갔다. 그리고, 한편 국내의 동지들과도 접촉하면서 독립운동의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그 해 2월 중순 상해를 떠나 귀국하였는데, 3월 2일 평양에서 3 ․ 1운동을 목격하고 서울에 와서 보성전문학교 강기덕(康基德) 학생 및 연희전문학교 한창환(韓昌桓) 학생과 연락하여 3월 5일 남대문역 앞에서 만세시위를 지휘하였다. 그런데, 이 시위는 고종(高宗)의 인산(因山)을 참배하고 귀향하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으며, 이로써 만세운동의 지방 확산에 한몫을 하게 되었다.

해공은 3 ․ 1 만세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일본 경찰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3월 19일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수립에 참여하였다. 그는 임시정부 헌정기초위원(憲政起草委員)으로 피선되어 10개조로 된 임시헌장(臨時憲章)을 제정하고, 국호(國號)를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정하는 데 일조하였다.

이 때, 해공은 임시정부 내무차장(내무총장 : 안창호)에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그 후 외무차장 ․ 국무원 비서장 ․ 외무총장 대리 ․ 법무총장 및 임시의정원 부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45년 8월 광복(光復)을 맞게 되자, 12월 1일 임정요인(臨政要人)들과 함께 환국하였다.

 

해공은 환국 후 대한국민당(大韓國民黨)을 창당하고 대표최고위원에 취임하였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부의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의장이 되어 의정활동(議政活動)을 펴나갔다. 1950년 제2대 국회에서도 국회의장에 피선되었으며, 1955년 민주당(民主黨) 대표최고위원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그는 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 정권교체의 여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던 중 5월 5일 심장마비로 급서함으로써 ‘민주화(民主化)의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956년 5월 3일, ‘한강(漢江) 백사장’에서의 정견발표(政見發表)는 국민들 사이에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사자후(獅子吼)의 명연설! 필자는 지난 5일 서울 수유리 묘역에서 거행된 추모식에 참석, 58년 전 해공의 ‘한강 백사장의 명연설’을 떠올렸다.

권용우
권용우

 lawkwo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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