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백 20. 고종의 눈물
역사고백 20. 고종의 눈물
  • 김명섭 사학과 강사 ·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15.04.01 14:02
  • 호수 138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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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원통하고 또 원통하도다”
▲ ▲ 고종황제 어진
감개무량하도다. 겨울을 이기고 희망을 맞이하는 이 봄날에, 단군과 애국의 정신이 살아있는 이곳 단국 대학에서 젊은 백성들을 만날 수 있다니, 고맙고 대견스럽도다. 내 오늘 96년 동안 쌓이고 쌓인 원통함과 분노를 토로하겠노라.

매년 3월이면 전국의 거리마다 3·1만세운동을 기리는 행사도 열리고 태극기도 곳곳에 걸려있는데, 물론 후손들의 뜻은 갸륵하도다. 허나 오늘날 백성들은 이 3·1운동이 33인 민족지도자들에 의해 계획되고 이끌어진 것으로 알고 있을 뿐, 그 밑바닥에 짐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울분이 깔려있음을 아는 이 많지 않구나.

짐의 죽음에 대해 지금껏 어느 누구도 언제, 어떤 이유 때문인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단지 일본 침략자들과 결탁한 이완용 등 간악한 간신배들이 평소 병이 깊다가 1919년 1월 21일 오전 6시 뇌일혈로 숨졌다고 발표했을 따름이다. 허나 상식 있는 이라면 전날까지도 멀쩡히 덕수궁 정원을 거닐던 짐이 어찌 밤참으로 먹은 식혜 때문에 급서했다는 저들의 말을 믿겠는가. 여기엔 필시 짐이 합방늑약서에 서명을 거부하고, 조선의 참담함을 세계만방에 알릴 것을 두려워한 저들이 힘없는 궁녀를 겁박해 독살케 한 것이니라.

사실 짐은 2개월 전부터 외조카인 전 내부대신 민영달과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 등 충신들이 비밀리에 중국 북경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지도해달라고 당부하여 동의한 바 있다. 민영달도 거금 5만원을 쾌척하여 북경에 거처할 행궁도 마련 중이었는데, 저들이 이를 알고 서둘러 악수를 쓴 것이라.

물론 짐의 죽음과 3·1만세운동으로 우리도 드디어 절대군주제를 끝내고 근대 민주공화정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음을 짐도 잘 알고 있다. 또 짐을 5백년 조선의 역사를 망가뜨린 가장 무능하고 불행한 제왕으로 꼽고 있음도 알고 있다. 심지어 중국의 지식인인 량치차오(양계초)조차 짐의 재위 45년동안 “위로는 생부에게 휘달리고 안으로는 부인에게 견제를 받고, 아래로는 귀척과 호족들에게 위협을 받아 좌우 근신들에게 현혹되어”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조롱한 바 있다.

허나, 짐은 원통하고 또 원통하도다. 12살 어린 나이에 집권한 이래 짐은 외세침탈과 쇄국정책, 개화파와 수구파, 척족세력과 동학군 등의 갈림길에서 늘 외롭고 처참했노라. 쇄국에서 벗어나 개화를 하려니 굶주린 백성들이 일어나고, 이를 제압하려 중국군을 데려오니 일본군이 궁을 점령해 버리고, 황후를 감싸려하니 무도한 왜적들이 처참히 살해하였노라. 겨우 대한제국을 세워 황제가 되었으나, 이미 국고가 바닥나고 매국노가 설쳐 나라를 통째로 팔아먹었노라.

하지만 젊은 제군들이여. 짐은 결코 왜적들의 강압에 밀려 나라를 판 적이 없노라. 옥쇄도 찍은 적 없고, 사인도 하지 않았노라. 외려 밀서를 보내 의병을 모으고, 멀리 헤이그에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였노라. 후대 지도자들이여. 짐의 불행을 절대 잊지말라. 널리 인재를 얻어 내치를 돈독히 하고, 절대 외세에 국익을 맡기지 말 것이며, 남과 북 7천만 해외 3천만 동포들의 힘을 모아 자손만대 번영의 길을 열라. 짐의 원통함과 원통함을 거울삼아 절대, 다시는 국치를 당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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