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만나는 청춘의 순간들 1. 꿈 없는 나, 비정상인가요?
철학으로 만나는 청춘의 순간들 1. 꿈 없는 나, 비정상인가요?
  • 김선교(철학·3)
  • 승인 2015.04.01 15:41
  • 호수 138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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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꿈’을 갖는 여정
▲ 일러스트 사현진 기자

청춘담론이 범람하는 시대. 방황하는 이십대를 위한 달콤한 위로의 말들이 심심찮게 출판된다. 그러나 ‘덮어놓고 괜찮다는’ 인스턴트식 처방은 청춘의 고민에 본질적 해답이 되지 못한다. 이에 청춘들이 직접 철학이라는 망치를 들고 청춘담론에 나선다. 기존의 담론들처럼 적당히 비껴 치는 것이 아니라, 청춘 문제의 핵심을 곧장 내리치는 것이 이 연작이 의도하는 바다.     <필자 주>

솔직히 이젠 지겨울 정도이다. 우리는 “꿈을 가져라”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분명히 각기 다른 삶을 살아왔을 터인데 어떻게 하나같이 똑같은 충고를 하는지 신기할 뿐이다. 대학에 들어와서 현실적인 고민과 더불어 한껏 날을 세워 날아오는 명령 앞에 속수무책으로 발가벗겨지는 스스로의 모습을 본다. 모든 이가 각자 하나씩 꿈을 손에 쥐고 있는 가운데, 빈 양손을 높이 쳐들고 철없는 방황을 일삼는, 나는 비정상이다.

죄책감과 수치심에 젖어 방구석에 처박혀 있을 때 한 남자가 어떤 책을 통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소유하지 말고 과감히 존재하라” 나는 되물었다. 무슨 말인가요. 그가 다시 톡 쏘듯이 대답했다. “꿈을 가지지 말고, 그냥 꾸기나 해라!” 말장난이나 정신승리에 불과해보이지만 그의 주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예컨대 “I dream(나는 꿈꾼다)”과 “I have a dream(나는 꿈을 가진다)” 각 문장은 동일한 의미인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존재하는 인간’의 후자는 ‘소유하는 인간’의 문장이다. 두 표현에서 ‘나(I)’와 ‘꿈(dream)’ 사이의 거리를 비교해보라. ‘가진다(have)’라는 동사가 둘의 간격을 얼마나 멀게 만드는가. 우리는 ‘꿈’을 손아귀에 쥐려고 애쓸 때 역설적으로 그것이 멀리 도망치는 것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꿈이 과연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소유의 대상은 고정된 사물일 필요가 있다. 아르바이트 월급 35만원이나 한국사 자격증 1급이 그렇다. 높은 연봉과 대기업 사원증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것들은 유한하며 따라서 소유도 영원할 수 없다. 진정한 ‘꿈’은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고정된 사물들은  도무지가 꿈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그것들을 굳이 말하자면 강요된 꿈, 죽은 꿈이라고 칭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살아있는 꿈을 꾸면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남자는 존재하는 삶을 ‘젊음’과 같은 말로 여겼다. 그는 소유하는 삶이 행하는 소비 양상과 대비하여 젊은이의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는데, 지금의 내 모습과 견주어볼 때 또 요즈음 우리 대학생들의 모습과 비교해볼 때 얼마간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세대들에게서 소유로 감추어진 형태가 아닌 적나라한 소비습관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에게 소비란 즐겨 행하는 활동 자체에 대한 순수한 기쁨의 표출일 뿐, 무슨 지속적 대가에 대한 기대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로지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 위해서, 보고 싶은 장소를 보기 위해서,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장거리 여행을 감행한다. 목표가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가치가 있는지 어떤지는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설령 진지함이나 철저한 준비, 또는 집중력이 결여돼 있을는지 몰라도 젊은이들은 과감히 존재하려고 할 뿐, 그 보상으로 무엇을 얻을지 무엇이 남을지를 문제 삼지 않는다” (『소유냐 존재냐』, 차경아 옮김, 까치, 1996, 107쪽)
에리히 프롬의 말은 차가웠다. 그럼에도 벌거벗겨진 나를 위로해줄 만큼 따뜻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나에게 그가 격려가 되었듯이, 모든 방황하는 젊음에게도 위안이 됐으면. 강요된 꿈에 묶여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 되돌아볼 기회가 됐으면. 새 학기에 어떤 수업을 들을지 기대하고, 어떤 책을 읽을지 고민하며,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들 추억에 지금 이 순간 설렌다면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자. 누군가가 또 다시 그렇게 충고한다면 괴테의 명언을 빌려 당돌하게 말대답할 것이다. “노력하는 한 인간은 방황한다” 아니, “꿈꾸며 존재하는 한 젊음은 방황한다!”

※ 망치 은유에 대한 부연설명: 니체의 저작 『우상의 황혼』에서 가져왔다. 여기서 니체는 세간에 자리잡은 기존 가치들을 우상으로 규정하면서, 이들을 망치라는 메타포를 가지고 내리친다. 그가 궁극적으로 꾀하는 것은 공허한 우상들을 고발하고 ‘모든 가치의 전도’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번 기획연재는 기존 청춘담론들을 삐딱하게 바라보고자 한다. 기성 담론들과 다른 시각으로 청춘의 고민을 이야기할 것이다. 이것이 망치 은유를 차용한 이유다.    

김선교(철학·3)
김선교(철학·3)

 dkdds@dankook.a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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