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경대 - 유행의 도시 파리에 유행없다.
화경대 - 유행의 도시 파리에 유행없다.
  • 김일수
  • 승인 2003.12.20 00:20
  • 호수 11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송두율 교수를 둘러싼 사법처리 문제, 이라크 파병, 대통령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 문제, 지난 대선 자금으로 들끓는 정치 공세 등 굵직굵직한 사회 현안을 두고 국론이 분열되는 양상마저 빚고 있다. 따라서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 또한 높다. 존경받는 원로의 권위 있는 한마디가 아쉽다고도 하고, 또 그러한 원로를 갖지 못한 사회 풍토를 개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에 대해 각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내는 자기 목소리는 시끄럽기 만한 파열음이나 소음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공적 영역에서는 언제나 다양한 의견이 경쟁하고 거기서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올바른 절차적 진리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정치적 해결을 명분으로 한 뒷거래보다는 훨씬 바람직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원로의 권위나 정치적 의사 결정이라는 단색의 목소리보다 국민 여론을 다성악적으로 수렴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정치 문화에는 분열에 대한 극심한 위기의식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듯하다. 그런 탓에 자기 세력 주위를 적이 온통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사고하는 습성이 있다. 특정 지역을 정치 요새화하여 적 아니면 아군으로 편을 갈라서 전쟁과 방불한 상황을 연출하는 것도 모두 거기에 원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영국 소설가 디킨즈는 ‘두 도시 이야기’에서 파리를 혁명의 폭력과 광기가 난무하는 암울한 잿빛 도시로 묘사하고 있다. 그의 눈에 비친 파리의 색깔은 회색이었다. 그것은 런던의 색깔이 파리보다 낫다는 작가의 확신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대혁명이 획일성을 거부하고 국가에 다양성을 추구하는 길을 열어 주는 분기점이 되었음을 간파하지 못했다.

유럽에서 프랑스만큼 다양한 색깔을 가진 나라도 없다. 프랑스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는 획일성에 대한 거부감은 거의 체질적이다. 그 결과로 ‘유행의 도시’라는 파리에는 정작 유행이 없다 하지 않는가. 서로 다른 개성이 빚어내는 다양한 색깔의 조화는 파리를 아름답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될 것이다. 남이야 무어라 하든 자기류를 고집하는 배짱과 신경 쓰지 않는 느긋함은 모든 분야에서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고 창의가 꽃필 수 있는 토양이 되고 있다. 그래서 프랑스가 가진 힘의 원천을 다양성에서 찾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복 문화가 지배하는 획일적 사회가 처음에는 힘이 있어 보일지 모르지만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는 건 역사가 말해 주는 진리다. 나치 독일이 그랬고, 군국주의 일본이 그랬으며 ‘붉은 제국’ 소련이 그랬다.
히틀러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것은 무엇이든 간에 ‘유태적’, ‘타락’ ‘부패’이며, ‘비(非)아리안적’이라고 몰아부쳤다. 이처럼 색깔을 지배하는 소수와 이를 추종하는 다수가 있는 사회에서는 발전과 진보가 있을 수 없다. 소수의 힘과 권위가 사라지는 순간 그 사회도 무너지고 만다. 총화와 단결만을 주입하는 슬로건이 판치는 사회는 장래가 없다. ‘강성대국’을 외치는 북한에서 미래를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유럽의 잠재력은 분리독립을 외치는 바스크가 있고, 코르시카가 있고 북 아일랜드가 존재하는 데 있다. 다양성에 대한 집착이 그만큼 강하다는 방증인 것이다.
정작 한국의 장래를 위해서는, 경상도는 더욱 경상도답고 충청도는 더욱 충청도다우며 전라도는 더욱 전라도다워야 한다. 지방색이나 향토색 자체는 장려할 대상이지 배격할 대상이 아니다.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터전이기 때문이다. 지역분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권력에 눈먼 자들에게 문제가 있을 뿐이다. 정치지도자가 할 일은 모든 분야에서 다양성을 보전하고 자유로운 소통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국민 역시 다른 목소리, 다른 색깔에 대한 존중과 아량을 보일 수 있는 성숙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두 도시의 이야기가 아니라 수십 개, 수백 개의 도시가 저마다 고유한 이야기를 가질 때 우리의 장래는 긍정적일 수 있을 것이다.
<공주영상정보대학 교수>동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