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자명의 항변
류자명의 항변
  • 김명섭 사학과 강사·역사칼럼니스트
  • 승인 2015.05.27 11:51
  • 호수 139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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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 만년에 수기인 을 집필 중인 류자명

나는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고등경찰들이 가장 무서워했던 조선의열단의 참모장 류자명이오. 왜놈들이 진짜 무서워한 이들은 명망있는 지도자들의 수많은 항일단체나 그들의 외교론·실력양성론 따위가 아니라 언제 어디선가 나타나 총탄을 퍼붓고 폭탄을 던지는 의열단원들이었소. 
부산·밀양경찰서와 조선총독부를 파괴한 박재혁·최수혁, 일본 육군대장을 상해에서 암살하려한 김익상·오성륜, 도쿄 황궁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 동양척식회사를 파괴한 나석주 등 불나방처럼 제 한몸 던진 수많은 의열단 동지들을 훈련시키고, 사지로 안내하는 일이 나의 임무였소. 그러니 일제는 나와 김원봉 단장에게 당대 최고액(현행가 약320억)의 현상금을 걸고 암살범과 밀정을 파견해 죽이려 혈안이 되었지요. 게다가 같은 독립운동 단체들을 이용해 우리를 암살과 파괴만을 일삼는 테러리스트, 공포와 혼란을 조장하는 무정부주의자로 몰아 이간질시키려 하였소. 광복 70주년을 맞는 오늘날까지도 김구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의열투사들을 테러리스트라 매도하는 후손들이 있다하니 통한을 금치 못하겠소. 
내 본래 꿈은 배고픈 동포들을 잘 살게 하려는 농학자가 되는 것이었소. 그래 1912년 고향인 충주를 떠나 수원농림학교(서울대 농과대 전신)에 취학해 졸업하고 학생들도 가르쳤는데, 3·1만세운동에 나서다 중국으로 망명하게 되었소. 상해 임정에서 임시의회 비서로 일했지만, 자리다툼과 명분싸움을 벌이는 모습에 실망도 컸지요. 다행이 신채호 선생을 만나 한국역사을 배우고,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에 눈 뜨며 자유연합주의 사상을 갖게 되었소. 
그러다 1922년 김원봉 단장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한 후 통신과 선전·교육책임을 맡게 되었소. 난 의열단 투쟁이 공포와 혼란을 조장한다는 비난을 반박하기 위해 신채호 선생을 모셔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을 작성케 하였소. 일제 강권통치를 파괴하고, 민중적 사회와 문화를 건설하자는 그의 웅혼한 주장으로 인해 의열단의 사기가 금방 높아지고 규모도 확대되었소. 
의열단원들은 이후 중국군관학교 장교가 되어 조선의용군의 주축멤버가 되었고, 나와 아나키스트들 역시 일제 요인암살과 친일파 제거에 앞장섰소. 올 7월 개봉예정이라는 영화 <암살>도 1933년 당시 상해에서의 우리활동이 주무대라 할 것이오.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우리도 조선의용대와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조직해 전선에서 직접 싸웠소. 나는 임시정부의 좌우합작정부 수립에 맞추어 국무위원이 되었고 헌법기초위원으로 참여하였소. 
일제 패망 후 나는 한국으로 귀환하려 1950년 6월 홍콩에 도착했으나, 조국에 전쟁이 일어나 발길을 돌리고 말았소. 그 후 호남성 대학에서 조선국적을 가진 채 30년간 원예학자로서 제자를 길러냈소. 1985년 꿈에 그리던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고 얼마 전 대전 국립묘지에 묻혔으니 아쉬울 따름이오. 조국광복과 대한민국 건설에 내 힘을 보태었으니, 나를 단순히 파괴만을 일삼는 테러리스트니 무정부주의니 하는 폄하는 하지 말아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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