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 70주년 특집 / 설립자 범정 장형의 독립운동 발자취를 찾아서②
■ 광복 70주년 특집 / 설립자 범정 장형의 독립운동 발자취를 찾아서②
  • 단대신문
  • 승인 2015.09.10 18:49
  • 호수 1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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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자금 모집 위해 운영했던 정미소터에서 설립자 애국 숨결 느껴

6월 8일, 답사 둘째 날이다. 답사단 일행은 이른 조식을 한 후 9시경에 출발하여 오전 11시 경에 길림시 반석현 연통산진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는 장형 선생이 군자금 모집을 위해 운영했던 정미소 터를 보기 위해서 왔다. 이번 답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코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통산진은 우리나라 행정조직으로 치면 ‘읍’ 규모의 시골도시였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 때에는 조선족들로 매우 붐볐다고 한다. 조선족들 이주 전 이 일대는 밀, 옥수수 재배의 밭농사 지역이었으나 조선족이 이주해 오면서 벼 농사 지역으로 바뀌었다.


범정 선생은 망명 초기에는 단동과 오룡배(五龍背)를 중심으로 미곡상을 운영하였고,  1932년 지린성 판스현으로 이주한 후 이곳 연통산진에서 정미소를 운영하였다. 장충식 이사장의 회고와 현지 조선족의 증언, 일제 재판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장충식 이사장은 “반석현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였는데 일본군 수비대가 이를 알고 정미소를 불태웠다”고 회고했다.


한시준 교수가 말하는 일본 재판기록에 따르면 “범정 선생은 1938년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재판을 받았다. 재판기록에 안동에 있던 김제현(범정의 조카)을 통해 반석현에 정미소를 구입한다”는 내용이 있다. 아쉽게도 답사단 일행은 범정이 운영하였던 정미소는 일제가 불태워서 볼 수가 없었고 그 터만 밟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일행는 그  터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인근에 있었다는 일본 헌병 수비대를 방문하고 연통산진을 떠났다.


연통산진의 정미소에 이어 답사단이 찾아 간 곳은 우당 이회영 선생이 세운 신흥무관학교였다. 신흥무관학교 역시 그 터만 남아 있었다. 영화 암살을 통해 새삼 유명해진 ‘신흥무관학교’. 무장 독립군을 양성하였던 신흥무관학교는 길림시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라는 조그만 시골마을에 있었다. 이곳 또한 범정 선생과 관련이 있는 것은 한시준 교수에 따르면 “범정 선생은 신흥무관학교 초기 졸업생 인 것 같고 청년들을 모집하여 신흥무관학교에 입교를 시키는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 말했다.


이는 1914년 평양 헌병대장이 조선총독부에 보고한 자료에 의하면 ‘범정(당시는 장세담이란 이름을 사용)은 평양에서 사라진 보성전문학교 학생들을 안동(단동)에서 만난 후 이들을 데리고 심양으로 가서 동순창사의 신재정의 집에서 이흘에게 인계하였고 이흘은 이들을 데리고 길림 방면으로 향하였다”고 하는 헌병대 자료가 있다는 것이다.


삼일째인 6월 9일 찾아 간 곳은 요녕성 선양시 평화구 서탑가에 있는 한교사무처였다. 한교사무처는 범정이 김홍일 장군을 만나 국내로 들어가는 통행증을 받았다고 한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동순창사였다. 1914년 평양헌병대장이 조사·보고한 정보 자료를 보면, 범정은 국내에서 탈출한 청년들을 안동에서 만난 후 이들을 데리고 심양으로 와 소북문 동순창사에서 다른 사람에게 인계한 곳이었다고 한다. 답사단이 다음으로 간곳은 1931년 9월18일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 만주사변’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한 기념관인 ‘9 . 18 역사박물관이었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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