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 옥상화가 김미경 : 삶의 오후 4시에 ‘진정한 나’로 거듭나다
서촌 옥상화가 김미경 : 삶의 오후 4시에 ‘진정한 나’로 거듭나다
  • 박다희 기자
  • 승인 2015.09.15 17:09
  • 호수 139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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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현대 사회에서 20대가 살아남기 위해선 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내 집 마련까지 총 다섯 개를 포기해야 한다. 이를 가리켜 오포세대라 칭하기도 한다. 심지어 오포도 모자라 꿈과 희망까지 내던지게 되는, 이른바 ‘칠포세대’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이런 우리 세대의 분위기와는 반대로 27년간의 월급생활자 삶을 청산한 후 가난한 전업화가의 길을 택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 바로 아늑한 화실을 마다하고 햇볕 내리쬐는 옥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옥상화가’ 김미경 씨.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전공한 김 씨는 졸업 후 20여년간 한겨례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했다. 이후 7년간의 미국 생활을 거쳐 ‘아름다운 재단’의 사무총장이 됐지만, 꿈틀거리는 그림에 대한 욕구를 버릴 수 없었다. 그 길로 전업화가가 된지 1년 반. 인생에 빗댄다면 오후 4시, 막간의 여유를 즐길 나이에 그는 서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지금은 간간히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옥상이나 길에 앉아 그림을 그린다. 소위 ‘폼’나는 일간지 기자를 거쳐 한 재단의 사무총장을 지낸 김미경 씨는 어떻게 화가가 됐을까?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가, 삶의 중요한 요소들을 쉽사리 포기하는 20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봤다.

 

▶ 20대를 흔히 ‘N포세대’라 부르는 것을 아는가.
경제적 압박으로 오히려 삶의 중요한 것들을 포기하는 게 아닌지. 취업은 충분히 중요하지만 거기에 너무 목매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회가 이러니 내가 어쩔 수 있나’라는 생각은 자신을 현대판 직장노예로 만들 수 있다. 부당한 사회구조에서 개인이 벗어나긴 어렵지만,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것도 결국 개인이다.

▶ 본인의 20대는 어땠는가. 지금처럼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나.
요즘의 20대가 경제적 압박을 느낀다면, 나의 20대는 격동의 80년대로 사회구조로부터 압박을 느꼈다. 그 당시 지식인의 대표는 대학생이었고, 사회에 어떻게 헌신하며 민중과 함께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들의 화두였다. 사회의 소용돌이는 거대했고, 이를 이겨내기에 나는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나의 20대는 개인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가 충돌하는 시기였다. 결국 사회적 자아가 이겼지만.

▶ ‘개인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라는 말이 독특하다. 사회적 자아가 이겼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본연의 내가 아닌 사회가 원하는 대로 산다는 것이다. 내향적이고 조용히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나를 감춘 채, 사회에 헌신하는 ‘용감한 나’로 개조했다. 과거 기자로 일하며 여성과 관련된 문화의 보편화를 위해 힘썼다. 돌이켜보면 적당히 개인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를 조화시켰으면 됐을 텐데, 억지로 진짜 ‘나’를 감추고 억누르는 일이 힘들었다.

▶ 그렇다면 소위 ‘폼’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그림’을 선택한 이유가 개인적 자아를 표출하기 위함인가.
그렇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기자생활 중 사내 동아리에서였다. 하지만 그땐 삶 전체를 ‘100’이라 본다면 그림이 차지하는 건 ‘1’밖에 되지 않았다. 기자를 그만둔 뒤 7년간 미국에서 생활을 할 땐, 내가 사회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하는 사회적 자아가 필요 없었다. 그때부터 억눌러져 있던 개인적 자아를 표출하고 싶었고, 한국에 돌아온 후 아름다운 재단 사무총장을 역임하며 그림교실에 다녔다. 그 당시 두 자아의 조화를 이루려 애썼던 경험이 지금과 같은 전업화가가 될 수 있던 밑거름이 됐다.

▶ 전업화가가 된지 1년 반이 흘렀다.
시간이 참 빠르다.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리는데 무엇이 부족하겠나. 행복하다. 작년 봄에는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곤 그림만 그렸다. 요즘엔 적당히 시간을 조절하며 그리고 있다. 또 지난 2월에는 옥상에서 그린 그림들을 모아 전시회도 열었다. 이렇게 나에게 찾아온 새로운 일들이 즐겁다.

 

▶ 별명이 ‘옥상화가’다. 특별히 옥상에서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있나.
사람은 각자의 시각을 가진다. 사진은 사진을 찍은 사람의 시각에서 본 세상인 것처럼 그림도 마찬가지다. ‘나’의 시각에서 보고 그려야 진정으로 ‘내’ 그림이 된다. 옥상은 지상에선 볼 수 없는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준다. 예를 들면 전봇대 위에서 지저귀는 새들, 병풍 같이 펼쳐진 산 밑에 기와집과 현대식 건물들이 뒤얽혀 있는 모습들….

▶ 옥상에서 그림을 그릴 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
옥상이 아닌 골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동네 주민이 주전부리를 챙겨주며 말을 걸더라. 지금은 친한 이웃사촌이 됐다. 화실에 앉아서 편하게 그리는 것도 좋지만, 밖에서 그림을 그리다보면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옥상화가’의 가장 큰 장점이라 생각한다.

▶ 지금은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그림 외에 도전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새로운 것을 도전하기엔 이제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지만, 새로운 소재로 그림을 그릴 순 있겠다. 마음 내키는 대로 그리고 싶어 요즘엔 ‘서촌의 꽃’을 그리고 있다. 꽃 그림 100점을 채우면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아! 서촌의 사람을 그려도 좋겠다.

▶ 서촌에서의 새로운 삶을 오후 4시라고 표현했다. 오후 7시쯤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사랑받는 화가가 됐으면. 서촌에서의 삶은 새로운 도전이었고 ‘옥상화가’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예측할 수는 없지만 그림으로 진정한 ‘나’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을까.

▶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접할 우리 대학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지금에 와서야 ‘도전과 행동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누구나 도전은 어렵다. 20대에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나’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고민 이전에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시간과 돈을 투자해 그것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보아라. 가장 많이 투자하고 있는 것이 결국엔 자기 자신이다. 진정으로 당신들이 원하는 삶을 살길 바란다.

 

▲ 김미경, 서촌옥상도2, 2014, 84×29.4cm, 펜
박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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