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만나는 청춘의 순간들 20. 대학생의 글쓰기
철학으로 만나는 청춘의 순간들 20. 대학생의 글쓰기
  • 김선교(철학·3)
  • 승인 2015.12.01 16:58
  • 호수 14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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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위가 곧 치열한 전투의 현장

프랑스의 기호학자이자 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작가로서의 자신을 ‘테러리스트’에 비유한다. 그의 초기 저작만 본다면 충분히 이해되는 말이다. 대표적으로 한 잡지에 연재했던 문화 비평 칼럼들을 모아놓은 『현대의 신화(Mythologies)』에서, 그는 일상의 모든 문화가 담고 있는 이데올로기들이 허위라는 사실을 기호론을 통해 폭로하고 있다. 바르트는 천재적인 글쓰기 역량을 가진 ‘반동분자’였다.

나도 그처럼 반동분자가 되고 싶었다. 나에게 글쓰기는 더 나은 리포트나 자기소개서를 위한 연습이 아니었다. 기존의 통념에 저항하고, 대학생의 기발함을 증명하는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싶었다. 2천자의 글 한 편을 위해 전운(戰雲)이 감도는 도서관에서 몇 권의 책을 살펴봤다. 노트북이라는 무기에 손을 얹자마자 본격적인 전쟁은 시작됐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는 요란한 총성처럼 들렸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바르트처럼 숙달된 테러리스트는 못 되었다. 오히려 미숙한 소년병에 가까웠다. 골격과 근육이 미처 다 성장하지 않아서, 조준점을 겨누기는커녕 총을 들기에도 버거운 아이. 치기 어린 총질 끝에 단 하나의 표적도 쏘아 맞추지 못했음을 발견하는 어린 병사가 바로 나였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성에 차지 않았고, 퇴고를 할 때면 자괴감에 빠졌다. 기자님께 글을 보내는 순간에는 여지없이 죄책감에 시달렸다.

올해 나는 ‘철학으로 만나는 청춘의 순간들’에 딱 여섯 편의 글을 실었다. 여섯 차례의 전투와 여섯 번의 몸부림. 그 이상의 밤샘과 끝없는 외로움. 마침표 뒤에서 나를 매번 기다리던 것은 낯설고 순진한 여섯 명의 ‘김선교’였다. 이제까지의 글들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본다. 헤세(Hermann Hesse)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된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써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데미안』中)

약 일 년 전에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제3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인데, 책의 끝에 수록된 정지향의 작가 수상 소감이 참 감동적이다. 다소 길지만 적어본다. “내가 쓰는 모든 비유가 무력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가령 너무 많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 고백을 해야 할 때. 첫사랑에게 보냈던 연애편지처럼, 이 고백 또한 한없이 순진하고 단순해질 것이라는 예감이다.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매일 밤 머리맡에서 별의 그것처럼 무기력이 폭발했다. 파편들을 이불처럼 덮고 내내 진득하고 깊은 잠을 잤다. ‘애들이 뭘 안다고 글을 쓰겠어?’ 무심한 사람들의 말이 자주 꿈속까지 따라왔다”

소설가이면서 평론가인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는 ‘파편(l’eclat)’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모든 파열과 모든 폭발 저 너머, 갑작스러운 것이 점차로 조금씩 조금씩”, “모든 것이 말해졌을 때 남아있는 카오스, … 다시 말해 남김없이 남아있는 것.” 파편은 모든 것이 진술되었음에도 예측할 수 없는 세계에 잔존한다. 이렇게 무(無)의 세계에서 진행되는 글쓰기를 통하여 글쓴이는 불확실하고 불안한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나’를 만나는 것이 너무나도 소중하기에, 블랑쇼는 “고통과 함께 사유하기를 배우기”(『카오스의 글쓰기』中)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글쓰기란 ‘나’의 바깥에서 ‘나’를 사유함이다. 글을 쓰는 과정보다는 글을 완성한 이후에 새로운 자신과 만난다. 낯섦은 항상 고통을 수반한다. 순진하고 보잘 것 없는 스스로와 마주하는 것이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다. 뿐만 아니라 ‘나’는 한꺼번에 사유되지도 않는다. 마치 날카로운 파편처럼, 매번 새롭게 쓸 때마다 아프게 박힌다.

그렇다면 ‘대학생’은 어떤 존재일까. (최소한 우리나라에서) 대학생의 지위는 특별하게 외롭다. 대학생은 철저하게 ‘사이’의 존재이다. 제도권 교육과 생존경쟁의 사이. 순수와 성숙의 사이. ‘사이’라는 단어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함을 함축한다면, 대학생은 ‘바깥’의 존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바깥은 단지 사회 속에서의 위치를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직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에 있기에, 우리는 심지어 우리 자신의 바깥에 있기도 하다.

이 시점에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대학생의 글쓰기’란 무엇인가. 글쓰기가 ‘바깥’의 행위이며, 대학생이 ‘바깥’의 존재라면, 대학생의 글쓰기는 그 자체로 동어반복적이다.

우리가 서있는 텅 빈 이 자리.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백지(白紙) 위가 곧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다. 대학생에게 글쓰기는 본질적인 행위인 것이다. 때문에 대학생의 글쓰기는 ‘대학생이 하는 글쓰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학생의 삶 자체’를 의미한다.

정지향 작가는 무기력의 파편 가운데 머무르며 마침내 글쓰기의 본질을 깨달은 것 같다. 그녀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무심한 사람들의 말이 맞았다. 나는 어리고 나는 뭘 모른다. 하지만 사랑을 말하고 글을 쓰는 과정 속에서만 한 가지씩 비밀을 알게 된다. 좋은 문장을 쓴 날보다 비밀을 새로 알게 된 날 밤에 더 단정하고 아름다운 꿈을 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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