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민요의 아버지 코다이 졸탄을 사사한 한국의 음악가

안익태 장두식(일반대학원 초빙교수)l승인2017.03.21l수정2017.03.21 22:07l1423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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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공원의 안익태 흉상

안익태! 근대 서양음악가. ‘애국가’와 교향적 환상곡 ‘한국 환상곡’의 작곡자. 한국인 최초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던 지휘자 겸 첼리스트. 이러한 약력을 살펴보면 그가 우리 근대음악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안익태가 영문 이름을 ‘Eak Tai Ahn’과 ‘Ekitai Ahn’과 같이 두 개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의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어두운 이면도 존재했다. 


안익태는 주로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했다. 1934년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독자들에게 음악이 ‘동포에게 유효한 봉사’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민족주의 음악가였다. 그가 1935년 미국에서 애국가를 작곡한 것도 그의 강한 민족의식에서 기인했다. 당시 애국가가 스코틀랜드 민요 ‘Auld Lang Syne’의 곡에 맞춰 불리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아 민요적 선율에 기반 하여 작곡한 것이다. 


  안익태의 민족적인 색채는 1938년부터 1941년까지 부다페스트 <리스트 음악원>에서 헝가리 민요의 아버지라 불리는 코다이 졸탄을 사사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그는 1960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궁상각치우 5음을 기조로 한 우리 음악에는 참으로 훌륭한 멜로디가 많은데 그것을 서양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번역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털어놓았다. 이는 헝가리 정신을 구현하는 민족음악의 완성을 자신의 소명으로 알았던 코다이의 민족주의적 음악관과 연결돼 있다. 

▲ 리스트음악원

코다이의 영향으로 ‘한국 환상곡’의 민족적인 색채가 더욱 정교해졌다. 한국 환상곡은 1938년 2월 더블린에서 그의 지휘로 아일랜드 국립교향악단에 의해 초연됐다. 이 때 연주된 곡은 ‘아리랑타령’과 ‘민속무곡’과 같은 민요 선율과 애국가 주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곡은 몇 번의 수정을 거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곡으로 세계에 알려졌다. 부다페스트 활동을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영웅광장 뒤편 시민공원에는 안익태의 흉상이 설치돼 있다. 


그런데 1941년 이후 안익태가 베를린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면서 ‘익태 안’에서 ‘에키타이 안’으로 변질이 일어났다. 19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는 ‘만주국 축전곡’을 작곡하고 지휘까지 한 것이다. 이러한 친일적인 활동은 독일의 나치즘과 일본 군국주의가 극성기에 접어든 정세와 무관하지 않지만 그가 전업적인 지휘자로 활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그가 음악적인 능력을 인정받아 한스 아들러라는 매니지먼트를 두고 흥행을 위한 연주자로 변모하였다는 말이다. 그때 유럽에서 인기 있는 주제는 ‘일본풍’이었다는데 더욱 문제가 심각했다. 이 시기 그의 활동에 대한 평가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예술을 민중과 더욱 더 가깝게 민중을 예술과 더욱 더 가깝게’라는 신념으로 음악 교육에 몰두했던 코다이의 일관된 생애와 안익태의 생애는 대비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공과를 어떻게 판단하든 간에 애국가와 한국 환상곡에서 울려나오는 강한 민족의식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장두식(일반대학원 초빙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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