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노동절 기념식 - 광장을 채운 노동자의 외침을 바라보다
세계노동절 기념식 - 광장을 채운 노동자의 외침을 바라보다
  • 김한길 기자
  • 승인 2018.05.15 10:17
  • 호수 14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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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기적을 대하는 우리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

"아버지의 손톱에 낀 기름때는 삶을 지탱한다. 어머니의 손톱 밑 흙에서는 희망처럼 곡식이 자란다. 일하는 사람들에 의해 대한민국은 여기까지 왔다." 지난 1, 문재인 대통령이 노동절을 맞아 국민들에게 전한 메시지다.
 

흔히들 우리나라 경제 성장 역사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한다. 우리가 일군 한강의 기적은 몇몇 재벌의 덕도, 양주보다 막걸리를 좋아했던 한 남자의 덕도 아니다. 기적은 성장우선주의 아래 희생된 노동자의 땀과 눈물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최근 논란이 됐던 대한항공 조현민 전 전무의 물세례 사건 같이 노동자를 하대하는 일이 만연한 현실은 씁쓸하기만 하다.
 

이에 본지는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린 제 128차 세계 노동절 기념행사를 찾아가 2018년의 노동자가 받는 부당한 대우와 그들이 원하는 세상이 무엇인지 취재했다. 이른 초여름의 날씨가 낯설었던 지난 1, 노동자들의 함성소리로 가득한 시위 현장 속으로 들어가 봤다.
 

▲ 시위에 참여한 민주노총 조합원과 시민들이 ‘재벌 개혁·비정규직 철폐’가 쓰인 피켓을 들고 있다.
▲ 시위에 참여한 민주노총 조합원과 시민들이 ‘재벌 개혁·비정규직 철폐’가 쓰인 피켓을 들고 있다.

 

단결, 투쟁! 포화 속으로

제법 여름 흉내를 내는 푹푹 찌는 5월 초의 오후 2. 오랜만에 아버지와 나들이를 나와 신난 어린 딸의 웃음소리, 가로에 핀 꽃을 핸드폰 카메라에 담는 사람들. 투쟁과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시끌시끌해야할 서울 시청 광장은 여느 휴일과 다르지 않게 여유롭고 발랄했다. 너무나도 조용한 거리에 기자는 혹시라도 헛걸음을 한 것이 아닐까하는 불안감을 가졌다. 초조함에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중, 뒤에서 검은 옷을 입은 수십 명의 남자들이 무거운 침묵을 몰고 기자의 옆에 열을 맞춰 선다. ‘단결 투쟁.’ 짧고 강렬한 구호가 적힌 빨간 띠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굳은 얼굴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그들이 입은 검은 조끼 뒤엔 전국건설노동조합이라는 흰 글씨가 굵게 박혀있다. 행사에 참여한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전국건설노동조합 소속 김영환(44) 씨는 노동의 민주화, 노동의 자유와 노동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서있다고 말한다. “모든 노동자를 대신한다는 의무감과 책임감 때문에 휴일임에도 이번 집회를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말하는 그의 짙은 눈썹 밑의 눈은 또렷했다.
 

이날 세계노동절 기념식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이하 민주노총)의 주관으로 열리는 행사로, 서울시청광장뿐만 아니라 전국 15개 지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된다. 민주노총은 참여 예상 인원이 수도권대회(서울경기) 2만 명을 비롯한 전국에서 5만 여명의 노동자가 참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예상보다 큰 행사규모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광장으로 향한다.

 

광장을 가득 메운 그들의 외침
노동자는 하나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귀를 때리는 날카로운 금속성 음성이 드디어 광장에 도착했음을 알린다. 족히 1만 명은 넘어 보이는 인파, 또 셀 수 없이 많은 깃발이 나부끼는 광경은 가히 압도적이다. 기자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민주노총 조합원으로 넓은 시청광장은 발 디딜 틈을 찾기가 어려웠다. 노조원들이 인터내셔널가(노동자 해방을 요구하는 민중가요)를 제창하는 가운데 민주노총 16개 가맹조직의 깃발이 무대 앞에 도열하면서 2018 세계 노동절대회 본대회가 시작됐다. 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은 노동자들이 쓰다버린 물건 취급 받는 세상을 뒤엎자며 대회사의 포문을 열었다. 김 위원장은 역사적인 4.27 판문점 선언으로 평화 기운이 확산되고 있다면서 그러나 우리 일터에는 아직 평화의 기운이 확산되지 못했다고 역설했다. 그의 힘 있는 목소리에 노조원들은 재벌개혁, 노동 헌법 보장이 적힌 하늘색 팸플릿을 머리위로 들며 동의를 표한다.

이날 김 위원장은 근로기준법조차 적용되지 않는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가 560만 명에 달하는 상황에서 잘못된 경영책임의 결과를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현실을 비판하며 정부의 조속한 대책마련을 요구했다. 김 위원장의 힘찬 연설에 그가 무대에서 내려간 뒤에도 노조원들의 노동 개혁을 염원하는 함성과 구호 소리로 광장의 하늘이 가득 찬다.

▲ 연설하고 있는 박경석 대표
▲ 연설하고 있는 박경석 대표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중증장애인
김 위원장이 무대에서 내려가고 휠체어를 탄 남자가 등장하자 함성으로 가득 찼던 광장은 엄숙해졌다. 휠체어를 탄 남자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대표. 그는 광장에 모인 수많은 조합원들을 천천히 돌아본 뒤 중증장애인도 엄연한 노동자’”라고 운을 뗀다. 박 대표는 중증장애인은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하루 8시간을 일해도 월 30만 원도 받을 수 없다노동기준법조차 최저임금을 보장 해주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어 우리 사회의 장애인들은 기본적인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그의 연설은 기자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최저임금의 사전 상 정의는 노동자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임금의 최저기준을 정하여 강제하는 임금이다. 그러나 최저임금 제7조에 따르면 정신장애나 신체장애로 근로능력이 현저히 낮은자는 최저임금의 적용 제외 대상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모순이다. 모순이 아니라면 장애인은 노동자가 아니라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받을 권리가 없다는 것인가. 연설이 끝난 뒤에도 장애인은 자본권력에 구속되는 물건이 아니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울분을 토하던 박 대표의 한 맺힌 음성이 머리에 맴돈다.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에게 오히려 기본적인 임금 조항조차 적용되지 않는다는 불합리한 현실에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
 

광장에는 민주노총 노조원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들도 자리했다. 김민정(35) 씨는 평소에 노동 관련 이슈에 관심이 많았는데 오늘 기념식이 열린다는 것을 듣고 들렀다아직도 기본적인 근로기준법을 적용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많은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 오늘에만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노동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광장 한 편에서 신문을 나눠주던 조소윤(23) 씨는 노동자의 부당한 현실을 알리고 싶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우리세대, 그리고 그 다음 세대가 맘 편히 일할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조합원들로만 광장이 채워져 있을 거라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노동절기념일에는 조합원들 외에도 많은 시민이 우리사회의 노동 환경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참여했다. 시민들에게 광장을 찾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부분 노동은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번 노동절 기념일은 민주노총의 조합원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기념일이었던 것이다.
 

▲ 자신의 이야기를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참가자
▲ 자신의 이야기를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참가자

 

광장에 공존하는 다양한 목소리들
광장에는 노동 문제만을 말하는 목소리만 있지 않았다. 시청 앞에서는 민중당의 정책 카트가 있었다. 시민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정책을 종이에 적어 카트 안에 넣어 자신이 원하는 나라를 꿈꿨다. 민중당의 정책 카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성매매여성은 피해자라는 피켓을 들고 서있는 청년도 있었다. 그가 나누어준 팸플릿에는 성매매여성이 왜 피해자인지에 대한 이유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새로운 관점에서 사회문제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였다. 또 광장 뒤쪽에는 익살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광장은 우리나라가 다양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줬다.
 

이처럼 광장에는 한 가지 담론이 아닌 다양한 담론이 공존했다. 같은 공간에서 다른 생각을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혼란'이 아닌 '조화'였다. 서로간의 의견을 존중해주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여 주는 우리나라의 성숙한 시민의식에 잔잔한 감동을 느끼며 카메라 전원을 끄고 광장을 나선다.

 

Epilogue
그들을 사람으로 기억하기
이날 광장에서의 공식적인 행사가 끝난 뒤 노동자와 시민들은 각 조직별 업종을 상징하는 물품을 내걸고 서울광장에서 광화문사거리를 지나 종로 4가까지 행진했다. 그들의 행진은 단순한 걸음이 아닌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노동환경을 바라는 희망의 발걸음일 것이다.
 

직업엔 귀천이 없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직업에 귀천을 만든다. 선조들은 육체노동을 소위 상것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했었고 지금까지도 육체노동자들에 대한 처우와 인식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번 노동절 기념식은 노동자들의 고충에 더 공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버스를 타고 서울광장에서 벗어나자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른 사람들은 점차 사라지고 시끄러운 스피커 소리도 점점 멀어진다. 오늘이 지나면 기자는 일상으로 돌아가 노동자들의 함성과 장애인 노동자가 겪는 삶의 고충을 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모두 잊는다 해도 이것만은 기억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들과 나는 같은 노동자라고. 또 그들도 우리처럼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김한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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