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트의 올바른 정의에 대하여
다이어트의 올바른 정의에 대하여
  • 박창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3.06 12:20
  • 호수 14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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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

뱃살은 더는 중년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들불처럼 비만이 확산하는 원인에 대한 논리적 설명은 명확하다. 반세기 전만 하더라도 2,000kcal를 먹기 위해 3,000kcal의 활동에너지가 필요했지만, 현재는 어떤가. 편의점에 다녀오는 정도, 즉 100kcal 미만의 활동 에너지면 2,000kcal의 열량 획득이 충분히 가능하다. 과거보다 훨씬 덜 움직이지만, 섭취 열량은 큰 폭으로 늘어났다.

유사 이래 굶어온 인류의 몸은 과잉된 열량을 예외 없이 비축한다. 살아남기 위해 먹을 것이 풍부할 때 잉여 에너지를 저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적게 먹고 견디도록 진화된 우리 몸은 불필요하게 저장된 지방을 버리는 법을 알지 못한다. 전력 과부하가 걸린 폭발 직전의 초절전 전구다. 저장강박증에 걸린 호더들처럼 한없이 쌓아둔다. 비만인의 몸은 티코 승용차가 그랜저를 싣고 다니는 것과 같다. 적정 체중을 견디도록 설계된 우리의 장기 또한 과열된 엔진이 망가지듯 손상을 입는다.

그래서 이제 어쩔 것인가? “뭘 어쩌나 살을 빼야지” 외치며 비만인을 보고 눈에 쌍불을 켠 채 달려드는 많은 무리가 있다. 현재 우리는 다이어트가 화두가 되고 대중에게 회자하는 시절에 살고 있다. 그러나 다이어트의 어원을 살펴보면 살을 빼서 체중을 줄인다는 의미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필자는 단언컨대 다이어트는 실체가 없는 뜬구름 같은 것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자신의 불어난 살을 타인에게 의뢰하여 빼내는 이들의 허황한 각오와 그 일을 맡은 자들의 포장된 진지함이 난무하는 곳이 다이어트 세계다.

온갖 과장 광고와 상술 앞에 우리의 건강을 내주고 마는 악순환을 우리는 왜 끊지 못할까? 빠르고 손쉬운 것을 추구하는 세태가 유달리 미용과 건강에 집착하는 우리의 정서와 결부된 결과다. 우리의 체중을 줄여준다는 명분으로 무모하거나 일시적 대안을 제시하는 수많은 상업적 매체 및 그 수단들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의 지방을 태운다며 궁극적으로 우리의 속만 태우거나, 우리 몸의 지방을 긁어내 주겠다 약속 후 우리 주머니의 돈만 긁어낼 뿐이다.

체중 관리 첫 번째 지침은 단연코 야식을 금하는 일이다. 야식 증후군을 가진 대부분 사람은 수면 전 극심한 공복감을 극복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필요한 것이 부족해 우리 몸이 음식을 요구하는 생리적 욕구가 아니라 취침 전 빈 배를 채우려는 욕망에 불과하다. 술을 포함하여 늦은 저녁 시간에 야식을 즐기는 습관을 가진 한 뱃살을 없앨 가능성은 없다.

건강식 식단인 지중해 식단(출처: REAL FOODS)
▲건강식 식단인 지중해 식단(출처: REAL FOODS)

정말 음식을 소중히, 감사히 먹을 일이다. 사과 한 알, 고기 한 점에도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사과는 우리에게 거저 자신의 살을 내어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과육을 내어주는 대신 자신의 씨를 대지 위에 퍼뜨려 달라는 무언의 약속을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소, 돼지도 마찬가지다. 남아있는 자신의 새끼들을 잘 돌보아 달라는 조건으로 자신의 피와 살을 우리에게 내어 주는 것이다. 그들의 살코기 한 점을 우리 입에 넣고 천천히 그 맛을 음미하며 밥반찬으로 감사히 먹을 일이다. 맹수처럼 그들의 살로 우리의 배를 채울 일이 아니다. 숭고한 마음으로 음식을 접하는 것이 그리스어 “디아이타”의 첫걸음이 되는 것이다. “Diaita-건강하게 균형 잡힌 영양” 우리는 현재 이것을 다이어트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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