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회 대학문화상 소설 부문 당선작 「세돋이 어드벤처」 및 당선소감
제43회 대학문화상 소설 부문 당선작 「세돋이 어드벤처」 및 당선소감
  • 이보현(문예창작·3)
  • 승인 2020.04.14 17:24
  • 호수 146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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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돋이 어드벤처」

이보현(문예창작·3)

 

1. 수

수는 어지러운 사이키 조명 아래서 사람들의 손등에 도장을 찍고 있었다. 노랑, 파랑, 초록, 빨강……. 주는 취업을 했고 영은 대학에 갔단 소리는 들었는데, 연락이 없네. 다들 죽었나? 나는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아, 돈 벌지. 그래야 술도 먹고 남자도 다시 만나지. 그녀는 이제 남자한테 미치려 해도 잘 미쳐지지도 않았다. 예전에는 주야장천 남자에 미치다 못해 내가 꼭두각시 인형인 줄 알고 살았는데.

화장과 개기름이 번들거리는 술 취한 얼굴들. 수는 얼굴과 채도가 달라도 너무 다른 여자의 손에 도장을 쾅 찍었다. 요란한 비트 소리에 맞춰 그녀의 에너지는 점점 더 다운되고 있었다.

12월이었다. 클러버들은 내년이 없다는 듯이 날뛰었다. 그녀는 뒤돌아 카운터 밑에 넣어둔 테킬라 샷을 입으로 패스했다. 제 식도로 입장하세요, 고객님. 매니저가 보면 한소리 하겠지만 휘황찬란 조명 때문에 붉은 얼굴이 들키진 않을 것이다. 쓴 뒷맛에 소금을 뿌린 레몬을 입에 구겨 넣었다. 그녀는 술기운이 돌아 다시 도장을 쾅쾅 찍었다. 하, 내년에는 지금 이 상태보단 나아지겠지.

그러려면 그녀는 문득 해돋이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연초에 떠오르는 해를 보며 행복을 빌자. 작년에 남자친구와 함께 간 해돋이 여행에서 수는 이 사람과 오랫동안 사랑하게 해달라고 빌었으나 돌아오는 길에 버스 예약 때문에 크게 싸워 헤어진 일이 떠올랐다. 좀 늦게 가도 됐었는데. 고작 버스 때문이었다. 고작.

“여행 가자.”

수는 여자 셋만 있는 단톡방에 글을 올렸다. 영이 답장이 왔다.

“말로만?”

“이번엔 진짜로.”

“너 맨날 남자랑 가잖아. 우리랑 가도 헌팅한 남자랑 사라지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괜히 화가 났다. 꾹 참고 핸드폰을 꾹꾹 눌렀다.

“이젠 사랑보다는 우정이야.”

“정말?”

“정말?”

영과 주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동시에 되물었고 수는 애써 변명하기 싫어 그냥 ‘너희 짜증 나’라고 대답했다. 카톡방 화면이 ‘ㅋ’으로 가득 찼다. 여행 갈 때마다 일정을 다 짜놓는 성격인 주가 말했다.

“해돋이 보러 가자. 정동진 어때?”

“콜.”

“좋지.”

"세 명이 가니까 이건 세돋이야."


2. 주

주는 오늘도 어김없이 지하철 속에서 서서히 찐만두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속옷 회사에 취직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평소에 사진과 블로그를 취미로 가진 탓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운 좋게 취직했으나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젊은 감각을 지닌 신생 회사라는 뜻에 맞게 스타트업은 신생아 시절 젖먹던 힘까지 쪽쪽 빨아도 체력이 모자랄 만큼 일을 시켰다. 주는 평생 다이어트를 하고 살았던 게 무색할 만큼 회사에 들어가자 식욕억제제를 끊어도 살이 쭉쭉 빠졌다. 웃어야 하는 건지 울어야 하는 건지 몰라 회사에선 눈치껏 웃고 퇴근하면 울었다.

집은 지방이었고 직장은 서울이었는데, 두 시간 반 대중교통을 타고 도착해 다시 두 시간 반 걸려 집으로 갔다. 합이 다섯 시간. 주는 멀미로 고생하며 차라리 로봇이 낫지 싶었다. 벌써 세 번째 환승하면서 왜 환승이 두 번이 아니고 세 번인지, 왜 두 시간이 아니라 두 시간하고도 삼십 분이 걸리는지에 대한 애매한 불편함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시리처럼 대화하고 알파고처럼 일하는 상상을 하면 쾌감이 일었다. 2019년에는 사차산업혁명이라고 쓰인 광고판이 번쩍거리지만, 자신의 몸이 홀로그램이 되지 않는 이상 이 거리는 절대 줄어들지 않을 것 같았다. 얼마가 걸리든 그냥 목적지로 향한다는 입력 문구만 머리에 뱅뱅 돌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애매모호한 불편함은 인간관계로 족한데. 그녀는 무릎 위에 살펴봐야 할 자료를 펼쳤다. 브래지어 사진 밑에 고객들이 요구하는 색, 와이어의 유무, 신축성 등의 기록표가 있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모르는 여자들의 가슴 크기를 점검할 무렵, 단톡방에 알림이 떴다. 수와 영이었다. 연말에 놀 사람 없으니까 연락이 오네. 속이 뻔히 보였다. 주는 화를 꾹 밀어 내리고 장소를 찾았다.

'정동진에서 연인과 함께 떠오르는 해를 보며 사랑을 약속하세요.'

해 뜨는 거랑 사랑이랑 뭔 상관이래. 주는 얼마 전 시간을 갖자는 남자친구가 떠올랐다. 싫으면 싫다고 하지 시간을 갖자는 건 뭐야. 그냥 나 말고 딴 사람 생겼다거나 넌 내 조건에 충족을 못 한다거나 바로 말해주면 덧나? 주는 포스트에 악플을 달려다 관두고 단톡방에 정동진을 가자고 말했다. 다들 좋다고 했다. 그녀는 그들이 찾기 귀찮아서 좋다고 대답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핀잔을 줘봤자 떠나는 건 내가 아닌 이 둘이었다.

“연말에 일정 비워 놔. 버스 예약하게.”

주는 문자를 보내놓고 다시 자료로 고개를 돌렸다.


3. 영

휴학한 영은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뭐하냐고 물어보면 토익과 공모전을 병행한다고 거짓말을 둘러대었다.

밖에는 벌써 크리스마스 준비로 가게 창에 종과 빨간 산타 모자가 달려있었다. 남자친구는 연말에 일이 몰려 바빴고 동네 친구는 연말에 아르바이트를 하면 보너스를 받는다고 맥주를 나르러 갔고……. 공모전은 얼마 남지 않았어도 내년까지 이대로 빈 노트북 화면만 볼 수는 없었다. 영은 돌돌 머리를 굴렸다. 문득 핸드폰에 ‘세 명’이라는 글자가 떴다.

수랑 주는 각각 영의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들이었다. 각자 다른 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장소에 살았으나 자주 이태원이나 강남에서 만나 술을 먹었다. 스물셋이 되고, 나이를 먹으면 그만큼 어른이 되어야 하는 사회 분위기에 밀려 이젠 일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했다. 결국 지금 셋 중에 둘은 예술을 한다는 좋은 핑계 하에 답 없는 미래를 외면하는 중이었고, 하나는 모던하게 취직에 성공했다.

수는 174㎝, 영은 162㎝, 주는 156㎝. 셋이 모이면 키 차이 때문에 도레미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영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도레미보다는 ‘도파시’라고 생각했다. 딱딱 정음에 맞춰 살진 않는 애들. 가끔은 앞에 #도 붙을 만큼 엉망진창인 불협화음. 그래서 맨날 모이면 하는 소리가 여기 참이슬 한 병도 아니고 두 병이요, 일까.

“여행 가자.”

수의 채팅에 영은 코웃음을 쳤다. 얘가 먼저 말하는 경우는 드문데. 이제 만날 남자가 드디어 떨어졌구나. 예전부터 수는 어디를 가도 항상 남자와 사라져 친구들은 그녀를 마술사라고 불렀다. 큰 상자에 사람이 들어가고, 문을 닫고, 다시 열면 감쪽같이 사라지는 마술이 떠올라서였다. 그런데 이건 들어간 사람만 없어지는 게 아니라 마술사까지 같이 사라져버리는 기괴한 마법이었다. 영은 몇 번 빈정거리다가 어차피 심심했던 터라 좋다고 대답했다. 첫 태양을 마주하면 게으름을 극복해 아르바이트라도 시작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4. 버스

고속터미널역임을 알리는 방송이 귓가를 때렸다. 영은 정신을 차리고 정어리 떼 같은 인파 속에 파묻혀 밖으로 향했다. 시간을 보니 십 분 정도 여유가 있어 커피와 과자를 샀다. 역을 나오니 12월 날 선 바람이 뺨을 무자비하게 후려쳤다. 코를 훌쩍대며 입구를 찾아 헤매던 와중 전화기가 울렸다.

“학교도 안 다니는 게 왜 늦어.”

짜증 가득한 목소리의 주였다. 대답도 하기 전에 수가 옆에서 말했다.

“야, 지금 버스 출발한대. 아저씨 화났어.”

시간을 잘못 본 걸 깨닫고 영은 뜨거운 커피를 쓰레기통에 던진 다음 사정없이 뛰었다. 학교 안 다니는 거랑 지각이랑 무슨 상관인지 생각하면서. 저 멀리 친구들이 보였다. 버스 아저씨는 투덜대며 시동을 걸었고 그들은 허겁지겁 안전벨트를 맸다.

출발하자마자 밤에 일하는 수는 곪아 떨어지고 영과 주는 양파링을 아작거렸다. 점점 달릴수록 밖은 하얀 풍경으로 바뀌었다. 주는 수를 흔들어 풍경을 보라고 했지만 일어나지 못했다. 영은 눈 덮인 산을 보며 전에 읽었던 설국의 첫 문장이 떠올랐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그 문장에 이끌려 책을 샀지만, 결말은 별로였던 것 같은데. 마지막에 모든 게 불타면서 끝났던가. 혹시……, 영은 기절한 수와 다람쥐처럼 두 번째 과자를 뜯고 있는 주를 보며 문득 이 여행의 끝이 걱정스러워졌다. 흔들리는 버스는 서울에서 점점 멀어지는 중이었고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도 끝났다는데 어디로 가는 건지 아기 예수처럼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영은 모르는 사람들의 잠든 얼굴을 보자 나중에 모든 게 불타 재가 되더라도 각자의 일상과 잠시 떨어져 있는 지금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지만 설국의 주인공도 첫 문장만큼은 평온했을 것이다.

“십오 분 드립니다. 화장실 가실 분 가시고.”

휴게소에 도착한 아저씨가 심드렁하게 외쳤다. 영과 주는 수를 깨워 비척비척 화장실로 향했다. 연말의 휴게소는 관광버스의 성지였고 화장실에는 알록달록 등산복을 입은 중년들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물끄러미 보던 주와 영이 중얼거렸다.

“야. 내년에 단풍 구경 안 가도 되겠다.”

“그러게. 고라니한테 입혀놓으면 로드킬도 안 당할걸.”


5. 어린양들의 기도

그들은 까마득한 하얀 언덕 밑에 서 있었다.

그러니까 저 오르막을 올라가면 뽀송뽀송한 양 떼가 있다는 거지?

“여기 누가 오자고 했냐.”

아직 피곤이 덜 풀린 수는 투덜거렸고 주가 받아쳤다.

“잠만 잔 놈이 말이 많아.”

매표소 직원은 그들을 대충 훑었다. 만팔천 원이요. 고속도로 하이패스 기계 같은 어투였다. 총무인 주가 카드를 내밀었다. 세 시쯤이어서 해는 한풀 꺾여 있었다. 졸린 표정의 수 뒤에서 영은 몰래 눈덩이를 만들어 그녀의 등 뒤에 던졌다. 퍽, 소리에 수는 인상을 구겼고 오르막으로 도망가는 영을 잡으러 뛰어 올라갔다. 주도 그 뒤를 쫓았다. 그들은 헉헉거리며 양이 있는 막사로 들어갔다. 영은 새하얀 구름 같은 양을 기대하고 문을 열었으나 눈 앞에 펼쳐진 건 회색도 아닌 잿빛의 덩어리들이었다. 그래도 얼굴은 하얗겠지, 생각하며 가까이 갔지만 그럴수록 누린내가 코를 찔렀다. 수는 큰 키로 영의 어깨를 꽉 누르며 한 손으로 코를 틀어막았고 주는 구역질이 나오는지 입을 막았다. 그들은 나가고 싶었으나 밖은 너무 추웠고 따듯한 똥 냄새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꼼짝없이 갇혔다. 구석에서는 한 바구니에 천 원인 먹이를 팔았다.

“카드 안 되겠지?”

지갑에 다들 현금이 없었다. 영은 빈손으로 만져보려고 했지만 매정한 양들은 맨입으로 되겠냐, 업신여기듯 고개를 돌렸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구나. 그녀는 동화책에서 본 친절한 동물은 다 거짓부렁이고 사실 사람보다 더 현실적인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순간 바닥에 떨어진 건초 부스러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직원의 눈을 피해 거지처럼 그것들을 주섬주섬 모았다. 겨우 한 줌이 되자 드디어 한 마리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손에 주둥이가 닿을락 말락 하는 무렵 갑자기 양이 고개를 돌려 신선한 건초를 쥔 손으로 향했다. 옆을 쳐다보자 주가 있었다.

“뭐냐?

“창고 뒤쪽에서 몰래 한 줌 뽑아왔어.”

영은 허탈한 마음으로 그녀가 먹이를 주는 사이 털을 만져보았다. 상상과 달리 감촉이 서울역 노숙자 수염 같았다. 충격적인 표정으로 뒤를 돌자 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낄낄거렸다. 그들은 자리를 옮겨 사람들이 기자회견처럼 셔터를 눌러대는 곳으로 갔다. 키가 큰 수가 갑자기 탄성을 질렀다.

“뭐야, 뭐야. 나도 볼래.”

수가 앞, 제일 작은 주가 중간, 그 뒤에 영이 서서 기차처럼 조금씩 길을 뚫었다. 그 앞에는 볕이 잘 드는 부분에 아직 털이 통통하지 않은 새하얀 새끼 양 세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마구간 같은 모습은 어디선가 캐럴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수가 중얼거렸다.

“쏘 뷰티풀.”

셋은 한참이나 그 어린 양들을 말없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괜히 경건해지는 마음이 들어 작게나마 소원도 빌었다. ‘제발 내년에는 몸 말고 마음도 어른이 되게 해주세요. 아멘.’


6. 동상이몽

“숙소 예약을 아무도 안 했어?”

“아 몰라.”

네 시 반이었다. 해는 옅어지고 날은 추워졌다. 그들은 막사 옆 천막 안에서 난로를 쬐며 긴급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예약이나 돈 관리는 모두 통상적으로 주가 담당하는 편이라 둘 다 대비를 안 한 게 화근이었나. 묵을 곳이 없었다. 이제 어두워지는 건 시간문제였고 12월 31일에 세 명의 잠자리를 잡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강릉의 방이란 방은 해돋이를 보기 위해 꽉꽉 찬 상태였다. 주가 씩씩거리며 둘을 몰아세웠지만 죄인들은 입을 꾹 닫았다. 유구무언이었다.

“저희 다섯 시에 폐장이에요.”

열린 문틈에서 직원이 머리를 디밀고 말했다. 주는 이들과 함께 여행을 오는 게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이 한심한 놈들. 한 명은 연예인 한다면서 클럽에서 일하고 한 명은 종일 카페에만 죽치고 있고. 왜 이렇게 대책들이 없을까. 먹고 살 집이 있어서 이런 걸까. 주는 자신의 이혼한 부모를 생각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눈칫밥을 먹고 자란 유년 시절, 외국으로 떠난 아빠와 저녁밥 대신 죠리퐁에 우유를 말아주고 놀러 나간 엄마를. 배고프고 몸이 아파도 자신의 탓이 아닌 상황이 많았다. 사람이 자주 억울해지면 마음속에 품어진 독을 곱씹으며 살게 된다. 그래서 주는 모든 시간 모든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자신은 누군가를 억울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가끔은 너무 최선을 다하려다 자신을 지키지 못할 때도 있었다.

계속 핸드폰을 뒤적거리던 수가 소리를 질렀다.

“방 있대!”

기적처럼 숙소를 구하는 앱에 게스트하우스 세 자리가 떴다. 바퀴벌레가 쥐만 해요, 추워서 패딩 입고 잤어요, 등등 좋지 않은 리뷰가 달려있었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바로 예약을 하고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낡은 게스트하우스 앞에서 셋은 주저하고 있었다. 경포대에서 택시로 십 분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이렇게 없다는 게 수상했다. 허름한 외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퀴퀴한 공기가 곧 무너질 것만 같은 불안감을 엄습시켰다. 짱구 가족이 가난할 때 살았던 ‘와르르 멘션’ 이 딱 이런 느낌이었지.

추위에 참지 못하고 들어가 보니 통나무로 된 테이블과 의자가 보였다. 주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인테리어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수염 난 주인아저씨가 카운터로 걸어왔다.

“잘 왔어요. 이거 하나씩 받아요.”

수염은 그들의 손에 포일로 싼 고구마를 하나씩 건네고 계산을 도왔다.

“춥죠? 저기서 앞에 앉아서 몸 좀 녹여요.”

그들은 나무 식탁들의 가운데 놓인 난로 앞에 앉았다.

“여기는 밥 먹는데, 저기 마루는 공용이니까 티비 보고 싶으면 일로 내려와요.”

수염은 친절한 말투로 그들을 방까지 안내했다. 이층 침대 두 개에 4인실이었다. 한 아래 칸에 짐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그 위에는 뜬금없이 매니큐어가 있었다.

“회사원 같은데?”

가방 사이 살짝 보이는 엑셀 자료들을 보고 주가 추측했다.

“좀 쉬다가 술 먹으러 가자.”

그들은 짐을 풀고 밑으로 향했다. 커다란 벽걸이 티비에서는 연말 시상식 중이었다. 그 밑에 남녀 둘이 맥주와 과자를 펼쳐놓고 있었다. 수가 저건 분명 호감있는 사이라고 확신했다.

“무슨 근거로?”

영이 물었다.

“여자가 머리도 안 묶고 화장은 풀 세팅이잖아. 그리고 남자는 세 캔이나 비었는데 여자는 한 캔도 안 비웠어.”

“너 혹시 셜록홈즈야?”

수는 저런 건 너무 뻔해서 대단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과거 자신의 연애사가 떠올랐다. 첫 남자친구를 만났을 때 살이 좀 찐 것 같다는 말에 며칠 동안 굶어서 응급실 신세를 졌었고, 들키지 않으려 다음날 데이트를 나가 다이어트에 성공했다고 자랑했다. 여름날 목에 땀띠가 나도 각진 턱 라인을 가리려 머리를 묶지 않았다. 그가 전화를 받지 않는 밤이면 친구들에게 날이 샐 때까지 전화해 하소연했다. 결국 그는 다른 사람에게 떠났고 수는 홀로 남았다.

그녀는 이제 더는 버틸 수가 없다는 느낌 후에 여러 남자를 만나 가벼운 만남을 가졌다. 그렇게 이별하고, 다시 매달리고, 망가지는 것을 반복했다. 자신도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혼자 남겨지는 생각을 하면 자꾸 죽고만 싶었다. 자신을 망가뜨리고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는 걸 그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단지 그녀는 자신이 첫 연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인형처럼 자신의 옆에만 있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수는 함께 맥주를 마시는 남녀를 보았다. 그래, 남녀관계란 저렇게 겉으로는 같이 행동하면서도 속으로는 각각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지.

그들이 티비 앞에 앉았다. 남녀가 인사했다. 해돋이를 보러 왔다고 했다. 몇 마디를 나눈 후 다 같이 시상식을 보며 남자들은 다 똑같은 턱시도만 입었는데 여자들은 각자 다른 반짝이 드레스를 입은 불합리함에 대해 떠들 즈음, 남자가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일어섰다. 여자는 남자가 사라진 걸 확인하자마자 다급히 말했다.

“내일 해돋이 몇 시에 보러 가세요?”

“아직 안 정했어요.”

수가 답했다.

“정말 죄송한데 그럼 내일 같이 가주실 수 있으세요?”

가자는 것도 아니고 가주실 수 있냐니. 어감이 좋지 않은데. 마치 도움을 요청하는 느낌이었다. 수는 남자가 사라진 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근데 혹시 뭐 불편한 거 있으세요?”

여자는 머뭇거렸고 그들은 그녀를 안심시켰다. 여자의 사정은 이랬다. 남녀는 직장동료였는데 아직 정식으로 만나는 건 아니었지만 자주 밥을 먹고 영화도 본 사이였다. 며칠 전 함께 맥주를 마시다가 남자가 자신의 고향이 강릉이라며 함께 해돋이를 보러 가자고 했다. 여자는 연말의 들뜬 분위기에 휩쓸려 동의했으나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에게 방을 두 개 잡자 말했고 그는 당연히 그러자고 했다. 그래도 일 잘하고 평판 좋고 친절하니까 괜찮겠지, 생각하며 어물쩍 따라가게 되었으나 저녁이 되자 남자는 갑자기 방 예약이 결제누락으로 취소되었다며 무덤덤하게 통보했다. 여자는 아무렇지 않은 말투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나이가 며칠만 있으면 서른이 된다는 걸 깨닫고 침착하게 방을 찾았지만, 그때 하필 핸드폰의 배터리가 다 되어버렸다.

남자가 데려온 곳은 허름한 모텔이었다. 그는 방이 하나 남았다고 했다. 순간 여자는 확신이 들었다. 아, 이 사람과는 잘되지 않겠구나. 그녀는 충전을 한 뒤 누구보다 빠르게 이 게스트하우스를 찾았고, 결국 불편한 마음으로 내일 해돋이를 보러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언니, 저희만 믿으세요.”

수는 여자의 손을 꼭 잡았다. 주는 게스트하우스 앞에 세워진 5인승 SUV가 생각났다. 그래, 택시비도 아끼고 무엇보다 연말이니까. 불우이웃을 도와야지. 영도 흔쾌히 동의했다.

“진짜 고마워요. 단둘이 있기 힘들었거든요. 자꾸 손을 잡으려고 하는데 너무 싫은 거예요. 그래서 좀 전에 일부러 매니큐어도 발랐어요. 편의점에 별걸 다 팔더라고요.”

멀리서 남자가 돌아왔고 그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어나보겠다고 했다.


7. 파이어, 로켓단

“벌써 세 바퀴째야. 그냥 편의점 갈래?”

12월 31일 경포대 앞. 식당들은 어디로 가든 새우 열 마리에 오만 원이라는 터무니없는 가격을 불렀다. 그들은 이제 위장과 다리에 감각이 사라졌고 SNS에 올라온 맛집이란 맛집은 모두 대기 번호를 걸어 놓았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이 많은 사람은 다 어디서 먹고 마시고 취하는 걸까. 영은 지친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저녁이었지만 다크써클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녀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끝내 그들은 최소 백 명은 들어갈 듯한 대형 식당의 문을 열었다.

“이모, 여기 꽃게탕 중 자랑 참이슬 두 병이요.”

원래는 광어에다 소주를 먹으려고 했으나 인당 최소 십은 내야 했고 영은 가성비가 그나마 나은 탕을 주문했다. 음식이 나왔고, 채 끓기도 전에 그들은 밥과 반찬으로 배를 채웠다.

“이제 좀 살겠네.”

주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소주를 땄다. 본격적으로 마실 준비를 마치니 이제야 탕이 끓었다.

두 병정도 비워지자 수가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이 층으로 올라갔다.

“쟤 또 누구 데려오는 거 아니야?”

영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꽃게탕 집에서? 설마. 만약 성공하면 다른 의미로 참 대단한 거야.”

주가 어이없다는 듯 웃어넘겼지만 오 분 십 분이 흐르고 수는 내려오지 않았다. 세 병째 마시는 도중 이십 분이 지났다는 걸 깨달은 영이 불안해졌다.

“올라갔다 올게.”

온돌식 마루에서 바닥으로 다리를 내리려는 순간, 수가 남자 셋과 함께 기세등등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저기 봐. 꽃게탕 집의 공주님이야.”

주가 집게를 이로 와드득 씹으며 비아냥거렸다.

“앉아도 돼요? 친구는 같이 마시자는데?”

대답하기도 전에 앉을 거였으면 왜 묻지. 한 명이 괜찮으면 둘도 괜찮다는 건가. 대한민국 민주주의 아닌가. 영은 수를 노려본 다음 떨떠름하게 인사를 받았다.

남자 셋은 사회초년생들이었고 온갖 질문들로 여자들과 공통점을 찾으려 애썼다. 주와 영은 그럴수록 일부러 청개구리처럼 굴었다.

“꽃게탕 좋아하세요?”

“갑각류 알레르기 있어요.”

“그럼 왜……?”

“꽃게만 빼고요.”

“내일 해돋이 보러 오신 거죠?”

“아니요. 아침잠이 많아서요.”

“미인은 잠꾸러기라던데.”

“밤잠은 없는데요.”

“아.”

남자들은 영과 대화를 멈추고 수로 화제를 돌렸다. 그녀는 잇몸이 마를 정도로 웃으며 응답해 주었다.

“우리 게임이나 할까요?”

남자 하나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옆에서 좋다고 난리를 쳤다. 또 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게임이 시작되었다. 달궈진 온돌마루 위의 뜨거운 온도의 사람들. 버너 위의 펄펄 끓는 꽃게탕. 커다란 식당을 쩌렁쩌렁 울리는 팅팅 탱탱 프라이팬, 삼육구 삼육구…….

모두 정신을 잃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정이 되기 이십 분 전이었다. 식당 안 사람들은 모두 티비에 나오는 보신각을 구경하고 있었다. 어느새 꽃게탕은 조림이 되었고 천사채만 남은 빈 회 접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저걸 언제 시켰지. 영이 눈을 비비고 테이블을 돌아보자 남자들은 아직도 팅팅 탱탱을 돌림노래처럼 중얼거렸고 수는 한 남자 옆에 모짜렐라 치즈처럼 붙어 녹아내리고 있었다. 주는 뭐할까. 그녀는 티슈를 뽑아 그 위에 뭔가를 쓰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속옷 사이즈 같았다. A75, 노 와이어, B80, 예스 와이어……. 첫 직장이라더니 압박감이 엄청났군. 그래도 취직한 게 어디야.

영은 문득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얘네는 돈이라도 버는데 난 뭐 하는 거지. 언젠가 재수학원 뒷골목에서 도시락을 가져온 엄마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 이제 나도 나이는 어른이란 말이에요.’

어른은 무슨 어른.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무언가를 선택하고 성취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사람들의 걱정이 귀찮아서 그럴듯한 말로 둘러대기 급급했다.

대학 동기들은 어학연수와 인턴, 외국 여행 등을 SNS에 올려댔고 한때는 그녀도 그런 것들을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무슨 운명의 굴레처럼 꼭 시작만 하면 버티지 못하고 도망쳤다. 이학년 때까지 부모님은 아직 괜찮다며 그녀를 다독였으나 삼학년이 되자 영은 그들이 자신을 외면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밤까지 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으면 조용히 문을 닫고 지나가는 식이었다. 영은 휴학 후에 그들 앞에서 배고프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되도록 함께 먹는 아침이나 저녁 식사를 피하려고 했다. 그들이 잠들거나 출근하기 전까지 누워있다가 배가 고프면 기어 나와 허기를 채웠다. 점점 자신이 쥐가 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수 옆의 남자는 자꾸만 그녀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남자가 수의 귀에 속삭였다. 그녀는 친구들의 눈치가 보였지만……. 잠깐 걷다가 신데렐라처럼 열두 시가 되기 전에 돌아오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수는 몽롱한 상태로 남자의 몸에 기대어 좋다고 끄덕거렸다.

“잠깐 나갔다 올게.”

하품하거나 티슈에 뭔가를 적고 있는 친구들이 자세히 듣지 못하게 웅얼거리고 수는 남자와 밖으로 나갔다. 다른 남자들도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며 함께 나섰고 테이블에는 주와 영만 남아있었다.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

영은 그들이 몰려나간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술자리나 클럽을 가면 수는 꼭 남자와 사라져서 다음날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큰일이라도 당한 게 아닐까 걱정돼서 밤새도록 찾아다녔으나 아침에 비몽사몽 목소리로 모텔방에서 택시비가 없다고 전화가 걸려왔다. 몇 번 그 일이 반복되고 나니 주와 영은 이제 그녀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몰라, 알아서 하라고 해.”

주는 수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뭔가를 적어 내려가는 자신의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자정 전까지 대리님에게 이 보고서를 넘겨야 할 것 같았다. 주는 자신의 상사가 이 얇디얇은 보고서를 눈앞에서 가차 없이 찢는 상상을 했다. 그럼 찢어버리지 못하도록 두껍게, 꽉 채워서……. 티슈 한 바닥을 빽빽하게 다 채우고 한 장을 더 뽑으려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어, 불이다.”

주는 자신이 보고 있는 장면이 꿈인 것만 같았다. 꽃게탕을 언제 치웠는지, 빈 버너 위, 꾸벅거리며 졸고 있던 영의 긴 머리에 불이 붙고 있었다. 그녀는 귀찮은 업무를 처리하듯 옆에 있던 물을 영의 머리로 뿌렸다. 가게 안이 일순간 타버린 그녀의 머리로 집중되었다. 삼 초 후, 그녀는 비명을 질렀고 저 멀리 직원이 소화기를 들고 달려오자 주는 상황이 끝났다는 표시로 손에 있는 티슈 뭉치를 머리 위로 팔락팔락 흔들었다.

“버려!”

영이 주의 손을 내려쳤다. 티슈는 아직 불씨가 남은 버너 위로 나풀나풀 떨어졌고,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헤헤. 불나방이다. 불나방.”

자정이 되기 십 분 전이었다. 주의 티슈 보고서는 재가 되었고 영의 머리카락 길이는 균형이 맞지 않았다. 정신이 차려졌다. 수는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테이블 위에 남겨진 지갑이 보였다. 남자 중 하나가 놓고 간 모양이었다. 그들은 그 안의 신용카드로 더치페이를 한 뒤 치타처럼 튀어 나갔다.

얼마나 헤맸을까, 그들은 큰 키의 여자를 찾아다녔지만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현란한 노래방과 모텔 간판들이 눈을 아프게 했다. 수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두리번거리다 다시 꽃게탕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에 보지 못했던 외진 골목 앞에 같이 술을 먹었던 남자들이 서 있었다.

“어딨어요?”

“네?”

“제 친구, 어딨냐고요.”

그들은 못 들은 척 머뭇거렸다. 영이 남자를 옆으로 밀치고 골목 사이를 보았다. 남자가 수의 옷을 벗기려 하고 있었다. 주가 전화를 들고 아, 거기 경찰서죠, 하며 으름장으로 놓자 남자들은 다른 곳으로 슬금슬금 가 버렸다. 골목 안에 있던 남자는 취해서 듣지 못했는지 계속 진행 중이었다. 영과 주는 옆에 있던 돌을 손에 쥐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남자는 머리를 감싸 쥔 상태로 뒷걸음질 치고 있었고 수는 친구들을 보자 울음을 터트렸다. 너희 뭐야, 남자가 외쳤다. 주는 구석에 쌓인 음식물 쓰레기를 번쩍 들었다. 비장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반쯤 풀린 눈과 꼬인 발음으로 외쳤다.

“로켓단이다, 이 새끼야.”

주가 봉지를 남자의 얼굴에 냅다 내리꽂았다. 수는 이제 울음을 그치고 코를 틀어막았다.

둘이 수의 양옆을 붙잡고 연행하듯 골목을 나오자 멀리서 남자의 친구들이 오고 있었다. 영은 음식물을 뒤집어쓰고 골목에 비틀거리는 남자와 그의 친구들을 번갈아 보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얘들아. 튀어.”

그들은, 오랜만에 다이어트를 좀 해볼 참이었다. 해피뉴이어, 새해를 알리는 외침이 들려왔다.


8. 금연

해가 뜨려면 한 시간 정도 남아있었다. 여자는 어젯밤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그들을 바라보았다. 키가 큰 애는 윗옷을 거꾸로 입은 채 치마가 돌아갔고, 중간 애는 머리카락이 불에 그슬렸고, 작은 애는 손에서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진동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여자는 이들을 깨워야 할지 망설였다. 그래, 새파랗게 어린 너네도 사는 게 참 버겁구나. 그러나 직장동료와 단둘이 해돋이를 보는 상상을 하자 진저리가 쳐졌다. 그녀는 결심한 듯 불을 켰다.

“저기, 일어날 시간이에요.”

씻을 시간도 없이 피난민처럼 짐만 겨우 챙긴 채 모두 남자의 차에 탔다. 남자는 근원 모를 악취에 숨을 참았다. 여자에게 눈치를 보냈으나 그녀는 모른 척 창문을 열었다. 셋은 어젯밤의 여파로 잘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밖에 뭐 있어요?”

남자가 분위기를 살리려 한마디를 던졌지만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 여자가 원해서 태워주긴 했다만 당장이라도 내쫓고 싶었다. 그리고 어제와 달리 냉랭해진 여자의 태도도 신경 쓰였다. 뭘 실수한 건지 생각해보려 했으나 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혹시 나랑만 오붓하게 있고 싶은데 저 셋을 태워준다고 흔쾌히 허락해서 그런가. 그는 여자와 여행을 약속했을 때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녀의 속을 일 퍼센트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유부남 상사에게 들은 대로 한방을 잡으면 끝난다는 계획을 실행했었다. 심지어 상사는 예식장부터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니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제 오후까지만 해도 이 사람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어떤 학원을 보낼지 까지 상상했는데……. 지금은 직장에서 말을 섞을 수 있을까도 예측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근데 쟤네는 여자애들이 왜 이렇게 냄새가 나는 거야.

남자는 ‘직장 스트레스 타파’라는 자기계발서에서 배운 478 호흡법을 실천하며 가까스로 해돋이 장소에 도착했다. 셋은 월요일 아침처럼 꾸물꾸물 차에서 내렸다. 정동진의 방파제 앞, 많은 인파가 설레는 표정으로 모여있었다.

“자, 십 분만 기다리면 해 뜰 거에요. 다 보면 이 주변에 순두붓집 맛있으니까 거기서 아침 드시고, 한 시간 뒤에 여기로 모이는걸로.”

공지를 끝마친 그가 자연스럽게 여자의 옆으로 다가갔다.

“우리는 어디로 갈까?

“아, 오빠. 저는 혼자 보려고요. 개인적인 소원이라서. 좀 집중하고 싶어요.”

그가 당황한 듯 어, 그래, 하며 얼이 빠진 틈에 여자는 바람처럼 뒤돌아 떠났다.

“하하, 엄청, 중요한, 소원인가, 보네.”

바람맞은 남자는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남은 셋은 눈치가 보였다.

“같이 가드릴까요?”

주가 예의상 말했고 남자는 괜찮다며 얼른 가라고 했다. 그들은 수군거리며 재빠르게 멀어졌다. 혼자 남은 남자는 우주의 먼지 한 톨이 된 기분으로 담배를 물었다. 여기 금연이에요. 멀리서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외쳤다. 하, 이번 연도는 진짜 끊으려고 했는데. 남자는 그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 다시 불을 붙였다.


9. 세돋이

드디어 해가 뜬다. 셋은 노른자 같은 태양 앞에서 맥락 없는 헛소리를 조잘거렸다.

“이야. 2020년이다.”

“무슨 어감이 과학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미래 시간 같아.”

“맞아. 자동차도 날아다니고 사람도 날아다니고 막 그런 거.”

“어떤 놈이 시간을 나눠놨을까, 괜히 부담되게.”

“맞아. 우리도 날아서 집에 가야 할 거 같아.”

“얘들아. 사랑한다.”

“쟤 아직도 취했나 봐.”

“아, 사랑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니까?”

“왜 사랑한단 말에 기분이 나쁘지.”

“대충해. 우리 아직 스물다섯 전이니까 괜찮아. ”

“해 다 떴다. 셋 세면 소원 비는 거야.”

“하나, 둘, 셋.”

삼십 초 정도 흐른 뒤, 영이 눈을 감은 채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 이제 스물넷이냐? 근데 내년에도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그럼 서른까지 괜찮다고 대충 말 바꾸면 돼.”

“…….”

“배고프다. 아침 먹으러 가자.”

셋은 일렬로 서서 순두붓집을 향해 걸어갔다. 과연 이들에게는 아름다운 미래와 밝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들이 걸어가는 길 위로 방금 솟아오른 아침 해가 강렬하게 내리쬐었다. 

<끝>


■ 소설 부문 당선 소감

이보현(문예창작·3)
이보현(문예창작·3)

이걸 쓸 시기에 저는, 어마어마한 겁쟁이였던 탓에, 세 명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했으나, 연애보다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부터 편집하기 시작했습니다. 돌아보니 저는 멍청이긴 했지만, 아직, 회생은 가능하더군요! (있어도 자리만 차지하는) 자기 연민, 남 걱정, 자존심, 사랑, 토익책 다 갖다 버리고 멍청이를 멍청이라고 써 봤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뭔지 알게 됐습니다. 지금도 앞이 깜깜한 건 맞지만, 불안하진 않습니다. 어차피 사람 일은 모르는 거고, 그렇게 바라던 안정도 불안의 근원이 될 수 있는 거니까.

이 셋의 앞날에는 화창함보다 장마철이 더 많겠지만(안타깝게도 이건 정말 사실이지만), 일찍 죽지 않았으면, 상처받아도 빨리 회복했으면, 매번 지더라도 다시 덤볐으면, 내 탓 말고 남 탓했으면, 오래오래 함께 술을 마셔줬으면, 아, 그리고 떠난 인연에 미련을 갖지 않았으면. 그들의 살 날은 이 글의 쉼표처럼 과하니까!

사실 민망할 정도로 어설픈 글입니다. 제가 아직 어설픈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다만 제 글을 누군가가 읽는다는 사실이 좋습니다. 그러니 씩씩하고 용감하게 계속 쓰겠습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하다는 말씀 올립니다.

<P.S. 피시방에서 아이돌 노래를 다섯 배속으로 들으며 의식의 흐름대로 쓴 글이 뽑힐 줄 몰랐습니다. 읽는 분들도 이렇게 쓰인 건지 모르셨겠죠? 내 옆자리에서 밤새 밀린 업무를 한 J, 수고했어. 우린 셋 다 별수 없이 잘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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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2020-04-27 21:04:36
훌륭한 작가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