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하회마을, 풍자와 해학의 미(美)를 말하다
안동 하회마을, 풍자와 해학의 미(美)를 말하다
  • 최호순 교수
  • 승인 2020.09.29 13:28
  • 호수 147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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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민국 안동 하회마을

안동의 하회마을은 14∼15세기에 조성된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전통마을로서 그 모습이 잘 보존된 가치를 인정받아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하회마을의 가장 큰 특징은 ‘풍산 류’ 씨의 집성촌이라는 점이다. 또한 풍수지리학적 측면에서 정확히 ‘배산임수(背山臨水)’에 맞게 마을 뒤쪽에는 산이 그리고 마을 앞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하회마을은 고려 초부터 허씨와 안씨가 마을을 개척했으나, 고려 말에 류씨 가문이 이전해 조선 중기부터는 류씨의 훌륭한 인물을 중심으로 마을을 석권하게 됐다. 류씨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중기 제14대 선조임금 시대의 걸출한 인물이었던 류성룡이 있다. 

류씨 가문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류성룡은 그의 이름 앞에 서애(西厓)라는 호(號)를 붙인다. 호(號)는 별명처럼 이름 이외의 자신을 표현하는 명칭으로서 류성룡의 서애(西厓)는 서쪽의 언덕을 뜻하는데, 이 의미는 류성룡이 하회마을 서쪽에 위치한 부용대라는 언덕에서 자신의 마을인 하회마을을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해서 붙여지게 됐다. 류성룡은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1501∼1570)의 수제자로서 24세의 어린 나이에 벼슬길에 오른다. 그의 뛰어난 능력을 알아본 선조는 40세의 류성룡을 고위관직에 발탁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말기에는 그를 시기한 정적들의 집요한 시기심으로 류성룡은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고 그의 고향인 하회마을로 낙향하게 된다. 고향인 하회마을로 돌아와서 1592년부터 1598년의 7년간 임진왜란 전쟁에 관하여 쓴 책이 오늘날 국보 132호에 지정된『징비록(懲毖錄)』이다. 이처럼 류성룡은 그의 탁월한 정치적 능력을 바탕으로 훌륭한 인물을 발탁하기도 했는데, 그가 바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에 한 분인 이순신 장군이다.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안동 하회마을' 전경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안동 하회마을' 전경

하회마을은 낙동강을 끼고 평지에 있다. 서쪽의 언덕에서 하회마을을 보면 기와지붕의 양반집과 초가지붕의 노비 집이 질서 없이 섞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런 마을의 모습은 류성룡의 사상적 이념이 반영된 결과다. 류성룡은 유년기 시절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의 수제자인 만큼 성리학을 공부했다. 당시 조선 시대는 엄격한 신분제도, 예의범절과 규범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을 강력한 국가의 이념으로 삼았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류성룡은 성리학과는 반대되는 양명학이라는 학문을 조선인 최초로 중국으로부터 접했고, 그 학문에 심취하게 된다. 그가 양명학이라는 학문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가 됐던『양명집』이라는 책을 접하고 35년 이후까지 간직했다는 사실은 류성룡이 양명학에 매우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양명학의 내용 중에 성리학과 배척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성리학의 엄격한 신분제도에 반대되는 만민 평등사상에 있다. 양반과 노비라는 엄격한 신분제도를 강조하는 조선 시대에서 만인이 평등함을 주장하는 양명학은 당시 조선 국가를 부정하는 것으로서 수용할 수 없는 학문이었다. 이런 양명학에 심취돼 평등사상을 중요하게 여겼던 류성룡의 의지는 하회마을에도 반영돼 하회마을을 구성하는 기와집의 양반들과 초가집의 노비들이 서로 구분 없이 섞여 있는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류성룡이 평등사상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엄격한 조선의 신분제도는 쉽게 바꿀 수 없는 강력한 사회제도였다. 오늘날 하회마을에서 행해지는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우리나라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에 지정돼 있는데, 이 놀이는 서민계급들이 얼굴에 탈을 쓰고 지배계급을 풍자하는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엄격한 신분 사회 안에서 지배계층의 비판으로 일관되는 탈놀이가 하회라는 양반마을에서 지배계층인 양반의 묵인과 경제적 지원 속에서 행해졌다는 사실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보면 매우 파격적이었다. 한편으로 하회탈춤이 신분제의 모순을 지적하고 노비들의 화풀이를 위한 단순한 놀이라기보다는 신분 계급 간의 모순과 갈등을 완충 시켜 신분제도로 구축된 공동체의 체계를 더욱 강화하려는 지능적인 양반 지배계급의 의도가 반영됐다고도 볼 수 있다. 하회탈춤이 매년 행해지는 것이 아니고 5년 또는 10년에 한 번에 행해졌다 하니, 자주 노비들이 양반들을 풍자했다가는 실제로 노비계층이 사회구조를 개혁하기 위한 시도할 것을 양반들이 우려해 가끔만 탈춤놀이가 행해졌다고 예상할 수 있다. 하회탈춤을 통해 양반들의 높은 신분제도를 유지하려 했던 서로 다른 모순들이 공존하는 하회마을은 오늘날 현대도시가 가진 사회문제와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최호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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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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