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지도자의 품격을 생각하게 해준다. 여왕은 25세에 왕위에 올라 96세에 서거할 때까지 70년 넘게 재위했다.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영국의 군주로 활동한 그의 서거에 영국민은 물론 글로벌 시민이 애도했다. 왜 그럴까. 바로 여왕이 보여준 ‘품격과 신뢰, 존경과 사랑 리더십’과의 이별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어려움이 많았다. 15명의 영국 총리를 거치는 동안 정치사에도 변곡점이 있었고, 왕실 내부에선 자녀들의 이혼 등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도 여왕은 말을 절제했고 품위를 잃지 않았다. 여왕의 어록 중 가장 기억나는 것은 “현재의 상태를 지키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 대목이다. 70년 권좌를 지킨 여왕이 현상 유지에 만족하지 말고 시대 변화에 잘 적응해야 현재를 더 단단하게 지킬 수 있다는 ‘역설의 지혜’를 강조한 것이다. 영국 국민은 그런 여왕의 품격을 존경했다.
지도자의 품격은 곧 국격이다. ‘품격(dignity)’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과 사물 따위에서 느껴지는 품위’다. 지도자의 품위는 품행으로 각인된다. 따라서 지도자의 말과 행동에는 품위가 있어야 한다. 지도자의 말과 행동에 신뢰가 쌓이면 국민 사이에 존경과 사랑의 꽃이 만개한다. 지도자의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가 국민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전남대 김봉중(사학) 교수는 『이런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에서 존경받는 미국 대통령 11명의 품격을 자부심, 되새김, 관용과 포용, 미래 설계 등으로 압축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세계 최초로 대통령제를 도입한 자부심, 28대 우드로 윌슨은 중립주의를 보편적 원칙으로 재탄생시킨 되새김의 상징으로 꼽았다. 남북전쟁 후 미국민의 통합을 이끈 16대 에이브러햄 링컨은 관용과 포용, 서부시대 개척의 초석을 세운 3대 토머스 제퍼슨은 미래 설계자로 분석했다. 이런 지도자들만 있다면야 국운이 성(盛)할 것이고 국민은 행복할 것이다. 그렇지만 지도자들은 작은 말 실수 하나로 금방 신뢰를 잃고 곤란을 겪기도 한다.
정치인이 무심코 저지른 말실수를 영어로 ‘개프(gaffe)’라고 한다.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은 입이 거칠어 품격이 땅에 떨어졌고,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도 ‘말실수 투성이(gaffe-strewn)’였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순 있지만, 지도자의 실언은 ‘본심의 탄로’라는 점에서 더 치명적이다. 진위 여부를 떠나 구설에 오르는 것 자체만으로도 국민은 불편해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순방 중 바이든 대통령과 환담하고 회의장을 나서는 과정에서 썼다는 비속어 논란의 뒷맛이 개운치 않다. 대통령실의 어정쩡한 해명도, 야당의 날선 비난도 결국 국격에 침 뱉기다. 윤 대통령이 지칭했다는 비속어 대상이 미국 의회냐, 우리 국회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의 자존감 훼손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말을 빌자면, 대한민국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선 모든 걸 바꿔야 한다. 더 품위 있고 더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 더 절제하며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는 정치권이 간절하다. 이번 사태가 그 전환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