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를 위해 요리한 남자, 이제는 ‘세상’을 위해 요리하다-천상현 요리전문가
‘최고’를 위해 요리한 남자, 이제는 ‘세상’을 위해 요리하다-천상현 요리전문가
  • 박준정 기자
  • 승인 2022.10.06 16:50
  • 호수 149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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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현(55) 요리전문가

Prologue
5년 임기가 끝나면 대통령도 떠나야 한다는 청와대에서 강산이 두 번 바뀔 때까지 일해온 이가 있다. 총 20년 4개월 동안 매일같이 대통령들의 식사를 책임졌던 천상현(55) 전(前) 청와대 총괄 쉐프가 그 주인공이다. 현재는 청와대에서 명예퇴직 후 요리전문가로서 <최고의 요리비결>, <알토란> 등 TV 출연을 통해 요리 비법을 전수하고, 때로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중식당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로 제2의 인생을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기자는 청와대 조리실에서 벗어나 이제는 국민의 식사를 책임지고 있는 그를 양재의 중식당에서 만났다. 

 

▶ 자기소개 부탁한다.
대통령 다섯 분을 모신 현대판 대령숙수, 이제는 자영업으로 살아가는 천상현이다. 

 

▶ 대학 시절 전공이 토목이라고 알고 있다. 요리사라는 전혀 다른 길을 간 계기가 무엇인가.
학력고사를 치르고 전산, 전자, 토목 순으로 원서를 썼다. 마지막으로 붙은 학과가 토목공학과였는데 막상 배워보니 토목 자체에 흥미가 없었고 현장에서 뛰어야 하는 토목 일과 맞지 않았다. 군대를 다녀와 빠르게 졸업한 뒤 신라호텔 중식당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지원하게 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 청와대로 들어가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김대중 전(前) 대통령 취임 후 청와대에서 중식 요리사를 뽑았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이 중식을 좋아하셨는데, 청와대에 중식 요리사가 없어 한국인으로 뽑으라 시켰다고 들었다. 신라호텔에서도 채용 공고가 내려왔고 호텔 측의 추천을 받아 두 달간 신원조회를 거쳤다. 사돈의 팔촌, 학생 운동권 경력까지 모조리 조회했다고 들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아 떨어졌다고 체념했는데 합격 통보 전화를 받았다. 이후 신라호텔에 정중히 사표를 낸 뒤 청와대에 들어갔다. 

 

▶ 청와대 쉐프로 일하며 기억에 남았던 순간은.
대통령을 모시는 사람으로서 명예와 자긍심이 있었다. 지지율과 관계없이 5년간 대통령이 무사히 퇴임하실 때 쉐프들에게 “여러분 덕에 5년 동안 잘 먹고 갑니다”라는 말을 해주실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등을 두드리며 위안 삼았다. 내가 만든 음식에 대해 대통령이 인정을 해줬을 때 동기부여도 됐다. 

 

▶ 근무 중 일상에서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인가. 
청와대 바깥에서 싸움에 연루되거나 사소한 논란에도 휩싸이지 않도록 주의했다. 보안에 신경 써야 했기에 말도 조심했다. 휴가도 제한적이었고 항상 긴장 속에서 살아야 했다. 관사에서 지내며 언제든지 호출되면 달려갈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과 마음 편히 1박 2일로 여행 한번 가는 것도 힘들었다. 

 

▶ 대통령의 전담 요리사로서 어떤 요리를 준비해왔는가.
신선한 식재료로 제철 음식을 대접하려 애썼다. 노무현 전(前) 대통령의 경우 막회를 좋아하셨다. 그래서 3~4월에 도다리 철이 다가왔을 땐 거제도에서 막 나온 돌 도다리로 음식을 만들어 모셨다. 비 오는 날은 해물파전을 준비하기도 했다. 국정이 혼란스러워질 때는 대통령의 입맛도 떨어질 수 있기에 여러 쉐프들과 상의를 거친 후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거나 즐겨 드시는 음식을 준비했다. 

 

▶ 오랜 세월 인생을 바친 청와대에서 명예퇴직했을 때의 심정은.
오전 6시 출근, 오후 8시 퇴근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늦게 일어나도 되고 자유롭게 시간을 누릴 수 있다는 시원함이 먼저였다. 한편으로는 두려움도 있었다. 대통령을 모신 쉐프지만 바깥에서 식당을 방문한 일반 손님들에게 내가 한 음식이 과연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 걱정도 많았다. 

 

▶ CCC(국가 원수 담당 쉐프 모임)에서 한국 대표로 활동했는데 어떤 일을 했나.
주로 각자가 가진 음식 정보를 교환했다. 많은 쉐프들이 우리나라의 불고기, 잡채 등과 같은 전통 음식 레시피를 많이 궁금해했다. 우리나라의 문화와 음식에 대해 쉐프들과 함께 소통하며 레시피와 선물을 주고받았다. 때론 다른 나라의 음식점을 방문해 전통 음식을 먹어보기도 했다. 1년 반 정도 활동하다 그 뒤론 코로나19로 많은 것을 하지 못해 아쉬웠다. 

 

▶ 현재는 식당을 차려 운영하고 있다. 실제로 경험한 자영업자의 삶은 어떤가.
솔직히 나는 다른 이들과 달리 스펙과 콘텐츠가 있었다. 그럼에도 너무 힘들었는데 경력이 적은 자영업자들은 얼마나 어려울까 싶었다. 만약 요리를 배우지 않았다면 식당업을 못 했을 것 같다. 그리고 음식에만 집중했던 청와대 생활과 달리 세금 납부, 식재료 가격, 아르바이트생 고용 등 부차적인 사항들을 모두 관리해야 하는 것이 힘에 부친다. 

 

▲천상현 쉐프가 자신이 운영하는 중식당에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천상현 쉐프가 자신이 운영하는 중식당에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 식당 운영 외에도 교수, 방송인, 자문 위원 등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어떤 일이 제일 적성에 맞나.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아끼는 마음보다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방송 쪽이 적성에 맞지 않나 싶다. 원래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하고 주변에서도 날 보고 끼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보는 방송에서 1부터 10까지의 정석적인 요리 과정보다는 몇몇 과정을 생략해 1부터 6까지로 축약한 나만의 요리법을 선보이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방송을 주업으로 삼기는 싫다. 모두에게 활력소 같은 역할로만 남길 원한다. 

 

▶ [공/통/질/문] 마지막까지 자신과 함께하고 싶은 것은.
건강과 가족이다. 올해 초에 건강상의 문제로 폐 30%를 잘라냈다. 아내가 항상 건강을 염려한다. 여태까지 일에 집중하느라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한 만큼, 남은 시간 동안은 가족들과 여행을 다니고 싶다.

 

▶ 마지막으로 대학생들에게 전할 말이 있다면. 
내 두 딸도 대학생이다. 아이의 대학 생활이 우리 때와는 많이 다르다는 느낌을 종종 받고 있다. 요즘 젊은 세대는 개개인을 먼저 생각하고 이기적인 모습이 많이 보이는 것 같다. 그러기보단 자신을 좀 내려놓고 조금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대학을 다니면 사회 구성원으로서도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희생한다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 조금 손해 본다는 생각으로 평생을 살아온 나도 가끔 내 것 챙겨야지 하며 후회될 때도 있었지만 결국은 내게 다 좋게 돌아오더라. 

 

Epilogue 
그는 최정상의 자리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관운을 꼽았다. 그의 겸손한 모습을 바라보며 어떻게 그가 오랜 기간 대통령의 전담 쉐프로 일할 수 있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동시에 기자는 하나의 명언이 생각났다. 세르반테스의 “근면은 행운의 어머니다”라는 것. 힘들지만 묵묵하고 성실하게 일한 자만이 어쩌면 행운을 맛볼 수 있는 게 아닐까. 

박준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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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unjeong@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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