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무사히 중립기어
오늘도 무사히 중립기어
  • 장수현(커뮤니케이션디자인3)
  • 승인 2023.10.12 13:14
  • 호수 15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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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일단 중립 기어.”

 

잠깐 SNS 속에서나 화젯거리가 되는 난생처음 보는 누군가의 사생활부터 9시 뉴스에 보도되는 대한민국이 떠들썩해지는 소식까지, 인터넷 댓글 창을 열면 흔히 볼 수 있는 말이다. 

 

‘중립 기어’는 자동차가 경사도나 관성에 따라 저절로 이동하게 두는 기어 상태를 뜻한다. 그러니까 중립 기어가 신조어로써 쓰일 때는 편을 들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라 ‘언제든 어느 쪽으로나 굴러갈 수 있는 상태’라는 말이다. 언젠가 필자가 이 표현을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려 보면 이미 댓글 창에서 섣불리 판단하기 바쁜 날 선 말들이 오갔던 터라 굉장히 ‘이성적이고 똑똑한 대처’라 여겼던 기억이 있다.

 

‘기어를 중립에 두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보다 무책임하고 현명하면서도 또 무해할 수는 없다. 길이 평평하면 가만 서 있다가 내리막이 나오면 이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쌩 굴러가 버리는 동그란 바퀴를 탓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책임이 결여된 선택은 중립 기어의 바퀴처럼 쉽고 빠르게 굴러가지만, 책임을 동반하는 선택은 무겁고 조심스러운 법이다. 하지만 그렇게 무거운 것들이 더 무거워지면 건너편 보이지 않는 것들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지금의 우리는 회색이 돼 둥글고 무딘 모서리를 바닥에 비비면 안 된다.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뀌는 경사도에 순응해서도 안 된다. 안락한 받침점의 한가운데 가만히 서 있기보단 고약한 땀내를 풍기며 오르막을 오를 줄 아는 젊은이가 낫다. 이제는 무거운 책임이 달린 선택을 해야 할 수 있어야 하고 쏟아지는 크고 작은 일들에 타의보단 자의로, 유려하게 들려오는 말보다는 일일이 주워야 하는 진실들로 날카롭게 반응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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