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묵처방
백묵처방
  • 정재철 교수
  • 승인 2004.11.07 00:20
  • 호수 11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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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재 철 교수
<언론홍보학 전공>

해방인가, 폭력인가

올 여름은 참 무던히도 더웠다. 그리고 어느새 가을이다. 한남동 캠퍼스에도 곳곳에서 낙엽이 한가롭게 느린 바람에 날리고 있다. 하늘은 쾌청하게 높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상쾌한 날씨가 낙엽과 함께 지금이 가을의 한복판에 있음을 알려준다.
나는 연중 내내 대학 캠퍼스에서 생활하는 것을 큰 복으로, 큰 낙으로 알고 지낸다. 봄이면 교정 곳곳에 개나리와 철쭉꽃이 피어나고 또한 신입생이 들어오면서 캠퍼스엔 활력이 넘쳐나고 나도 덩달아 신이난다. 더욱이 문학관 6층 서편에 내 연구실이 위치하고 있어 봄이면 창밖으로 나무들마다 새싹이 움터나고 새잎이 달리는 것을 지켜볼 수 있어 무엇보다 즐겁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에서 누구보다도 큰 정원을 갖고 사는 큰 부자라고 늘 마음속으로 되뇌곤 한다.
학교에서 맞는 봄이 좋은 이유는 또 다른데도 있다. 5월의 신록 속에 해마다 찾아오는 스승의 날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쯤 되면, 그간 정든 몇몇의 학생들이 연구실로 찾아와 작은 꽃바구니를 선물해 준다. 그 몇 개의 작은 꽃바구니가 내가 대학의 선생임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내가 봉직하고 있는 이 직장과 현재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금 일러주고, 또한 내가 오늘 이곳에서 가르치는 학생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시 한번 성찰하는 계기가 되어준다.
이밖에 5월의 봄에 열리는 대동제를 학교에서 구경하는 일도 즐겁다. 학생들이 교정 곳곳에서 펼치는 다양한 퍼포먼스를 지켜보면서 대단위 강의실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학생들의 끼와 재능과 재치를 볼 수 있어 좋고, 이들의 퍼포먼스에 묻어있는 순수함을 통해 내게서 점점 엷어만 가는 삶을 대하는 진정성을 회복할 수 있어 또한 즐겁다.
봄 학기가 끝나고 덥고 지루한 여름방학이 지나면 다시 가을학기가 시작되어 학교에서의 가을 생활이 시작된다. 반소매를 입고 시작하는 강의가 점점 긴소매로 바뀌고 옷의 두께가 점점 두터워지면서 교정의 가을은 깊어만 간다. 교정의 봄과 봄꽃들이 생명의 신비를 일깨워준다면 교정에서 맞는 가을과 가을의 단풍은 생명의 끝자락에도 풍요로움이 있음을 내게 일러준다.

이렇게 나는 학교생활을 음미하면서 늘 즐기며 지내는 편이다. 그런데, 그런데, 꼭 한 가지 학교생활에서 내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롭힘을 당하는 일이 하나 있다. 사실 난 오늘 그것을 고발하는 심정으로 백묵처방에 초대받지 않은 기고 원고를 쓰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 연구실 주변, 넓게는 문학관 6층 교수 연구동에 들려오는 풍물패 학생들이 만드는 소음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때로는 한 두 팀도 아닌 풍물패들이 일년 내내 문학관 주변에서 끊임없이 풍물 공연 연습을 하고 있다. 지금 이글을 쓰고 있는 오후 5시 즈음에도 굿판을 벌이는 듯한 꽹매기와 징소리의 소음이 들려오고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백묵처방란을 통해 풍물패에 속해 있는 우리 학생들에게 캠퍼스 구성원들이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첫째는 옥외 풍물 연습은 특별한 야외 공연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면 금지하되, 학교 당국과 상의하여 학생회관이나 강당 등과 같이 상시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방음 시설이 되어 있는 공간에서 풍물 연습을 하는 방안을 찾아보라는 것이다.
둘째, 그것조차 여의치 않고, 꼭 옥외에서 풍물 연습을 해야만 한다고 고집한다면, 최소한 학교 신문 등을 통해 풍물 연습 시간과 장소를 늘 예고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불시에 들리는 소음에 교수님이나 다른 학생들이 개인적인 대비를 할 수 있도록, 즉 소음이 예측 가능하도록 연습 시간을 고지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이와 더불어, 학교 당국에도 제안할 일은 다소 경비가 들더라도 풍물패가 연습하는 실내 공간에는 가능한 방음시설을 해 줄 수 있도록 하고, 옥외 풍물 연습은 실내로 유도할 수 있도록 연습 공간과 실질적인 선도를 부탁드리고 싶다.
예전에 내가 대학원 시절 배우던 은사님 한분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학교 교정에는 울긋불긋한 화려한 꽃나무도 키우면 안 된다. 공부하는 학교는 늘 가라앉아 있어야 한다.” 나는 이 말씀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다.
풍물패의 음률은 풍물을 하는 본인들에게는 아름다운 전통 음악의 소리가 될 진 몰라도, 그것을 좋건 싫건 들어야만 하는 교정에서 생활하는 다른 구성원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풍물패 학생들이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그것이 교수와 학생이 가라앉아 있는 학교, 공부하는 학교를 함께 만드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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