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경대 / 봄-시작입니다
화경대 / 봄-시작입니다
  • 유인식
  • 승인 2005.03.23 00:20
  • 호수 11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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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시작입니다

봄입니다. 차갑게 언 땅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그게 순리입니다. 신문에는 벌써 봄을 알리는 소식들이 넘쳐납니다. 야산의 나무숲은 앙상한 가지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지만 그 속엔 봄의 숨결이 묻어 있습니다. 거기 어디쯤에서 봄은 천천히 내려오고 있습니다.
겨울의 끝. 교직에 종사하는 한 사람으로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드는 몇몇 성적 조작 등의 부정사건 기사를 접하면서 새봄을 맞이하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하지만 봄의 시작과 함께 교정엔 새 얼굴들이 수줍은 듯 고개를 내밀 것이고 정해진 학사일정대로 학교는 다시 활기를 띨 것입니다.
봄방학 중인 며칠 전엔 학교에 가서 책상 정리도 하고 새로 배정된 교실에 가서 교실 이곳저곳을 한 바퀴 휘 둘러보았습니다. 책걸상도 가지런히 하고, 입시자료도 학급문고함에 옮겨 놓았습니다. 책상 속과 사물함도 정리하고, 칠판도 깨끗이 닦아놓았습니다. 교탁에 손을 얹고 3월 2일에 만날 새 식구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리고 공연이 시작되기 전 리허설을 하듯 첫 마디를 시작해 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저는…”
20년이 조금 더 되는 담임 경력인데도 새 학기가 시작되면 마치 첫발령을 받았을 때처럼 마음이 설레는 것은 아직도 설익은 증거일까요? 아니면 아직도 풋풋한 열정이 남아 있다는 걸까요? 되도록 후자라고 자부하면서 빙긋이 미소를 지어봅니다.
‘입시지옥’이라 부르는 이 현실에서 그네들이 걸어온 길은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교에서 학원으로 도서실로 자리를 옮기면서 오직 ‘대학’진학을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들은 한결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네들이 마음속 깊이 갖고 있는 꿈은 조금도 같지 않습니다. 교실 책상에서는 똑같은 교복에 똑같은 학사일정에 그 ‘다름’이 눈에 띄지 않지만 조금만 귀기울여보면, 조금만 그들의 속내를 들춰보면 엄청난 꿈과 소망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더욱 소중합니다. 교사는 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의 ‘희망’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희망’이 ‘현실’이 되도록 두 팔 걷고 땀흘려야 합니다.
교무실에 와서 첫 만남 때 나누어줄 자기소개서도 프린트하고 집에 와서는 명함도 칼라로 인쇄했습니다. 첫만남 때 시간표와 함께 개인 명함을 나눠주면서 낯을 익히고자 하는 것입니다. 개학을 하면 여러 가지 일들로 어수선하겠지만 그 와중에도 교실에서 만날 새 얼굴들과의 만남은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네들과 진행할 새로운 ‘수업’에 숨조차 달뜹니다.
우리의 만남은 영화‘번지 점프를 하다’에 나오는 대사처럼 하늘의 홀씨가 바람에 떠돌다가 지상에 박힌 바늘귀로 쏙 들어가는 그 엄청난 인연이니까요. ‘아, 참 기분 좋다.’, ‘올해는 더욱 새로운 일들이 잔뜩 일어날 것 같아.’그렇게 다짐하고 자기 암시를 주면서 새롭게 시작했으면 합니다. 부족한 것은 서로 채워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는 재미로 한 해를 보냈으면 합니다. 수업은 ‘서로 배우는 행위’니까요.
도종환의 시 <겨울은 끝나지 않았지만>을 떠올려 봅니다. “…지금 이렇게 눈 내리고 바람 세지만 이제는 결코 겨울이 사랑보다 길지 않으리란 것을 압니다. 사랑이란 이렇게 깊은 받아들임인 것을 압니다. 이제 나는 누구의 흙이 되어야 하는지를 압니다.”
봄입니다. 이 봄의 기름진 땅에서 아름다운 열매가 맺도록, 그래서 모두가 더 행복해지기 위해 곧 다가올 꽃샘추위부터 이겨내 보리라 다짐해 봅니다.
유인식 <교사> 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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