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경대 / 가르쳐 준 적도 없건만
화경대 / 가르쳐 준 적도 없건만
  • 김일수
  • 승인 2005.11.22 00:20
  • 호수 116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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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쳐 준 적도 없건만

얼마 전 학과 가을 행사를 마쳤다. 근 한 달여 촬영과 편집을 하며 학생들이 밤을 낮삼아 고생했다. 뒤풀이 자리에서 대견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술잔도 돌려가며 그간의 고생담을 아름다운 추억처럼 나누며 얘기꽃을 피웠더랬다. 여기까지 좋았다. 얼큰한 술기운을 기분 좋게 느끼며 대리운전해서 집에 오기까지는. 도착해서 곧바로 전화 한통을 받았다. 선배한테 얻어 터졌단다. 누군 이빨이 나가고 누군 안경이 깨지면서 눈두덩이 찢어졌다는 거다. ‘병원에서 지금 응급처치 중인데 어떡하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후배들이 적극적으로 행사준비에 협조하지 않아 선배들이 ‘군기’잡은 것이란다. ‘놈들 군기 한번 제대로 잡았네!’ 그 후로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른다. 전화통을 붙들고 맞은 학생 집에... 때린 학생 집에... 병원에... ‘선생이 지도를 잘못해서 이런 불상사가...’ 뒤에 안 사실이지만 ‘행사준비 비협조’는 합법적(?)인 이유이고, ‘버릇없다’는 것이 진짜 이유였다. 후배들이 뻣뻣해서 선배 말발도 안서고, 말하자면 평소 쌓인 감정풀이를 한 거였다. 학회장을 야단치니 학과 질서를 세워보려고 한 거였단다. ‘나, 참.’
가르쳐준 적도 없건만,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이 가져다 준 질서를 그대로 답습하는 참 영특한 놈들이다. 이 세상 질서가, 이게 그냥 만들어졌겠는가. 이건 폭력의 매끝으로 이루어진 질서다. 나 어릴 때, 집에서 매 맞고, 학교에서 매 맞고, 커서 군에 가선 졸병 때 당한 폭력을 고참 되어 고스란히 돌려주고, 사회에 나가선, ‘중정’, ‘남영동 대공분실’이란 으스스한 이름 끝에 오르내리는 고문의 소문을 들으며 나하곤 상관없는 일인데 하면서도 모난 놈 옆자리 피해가며 몸조심하지 않았던가. ‘그래, 맞다.’
선후배, 기수, 짬밥이 무슨 오륜(五倫)중에 한 가닥이라도 되듯 이걸 기준으로 하여 이 사회를 질서정연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 질서를 받아들여, 혈연, 지연, 동문, 동업자가 공생하는 우리 사회가 되지 않았던가 말이다.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이런 유토피아는 물론 폭력이 밑받침이 되어야 하는 거다. 바로 이 질서정연한 공생의 법칙을 깨트리면 ‘버릇없는 놈’이 되는 것이다. 선후배, 기수, 짬밥의 질서를 깨트리는 행위는 심각한 범죄이기에 마땅히 아주 자연스럽게 폭력으로 다스려야 할밖에. ‘그래, 잘났다!’
벌써부터 송년회 술자리 일정을 잡자고 걸려오는 전화가 더러 있다. 그 자리에선 폭탄주 돌려가며 ‘우리가 남이가’ 목소리 높여 질서정연한 공생사회를 자축할 게 뻔하다. 삶의 경쟁 터에서 상처입고, 꺾이고, 따돌림 당하며 쌓였던 울분을 편안한(?) 자리에서 확 풀어버리고 싶을 거다. ‘형님!, 아우야!’ 어깨동무도 정겹게 가슴 속 진한 고독과 고통을 담아서 소리 질러 보고 싶을 거다. ‘우리가, 남이가!’
내 말이 거슬린다면, 모임에 나가 선후배, 기수, 짬밥의 질서를 쓰윽 무시해 보라. 아마 당신의 윗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한테 그러는 것까지는 봐줄 수 있다. 아암, 봐주고말고. 그런데 네가 우리 형님한테 이러는 것은 내 참을 수 없다. 너 지금 당장 사과해, 아니면, 너 쓴맛 좀 봐야겠어. ‘괜히 나섰다가 죄책감 느낄 것 같아.’
학생들 어떻게 해결됐느냐고요? 부모들 화해시키고, 선후배 화해의 술자리에서 감동 없는 연설하였고... 다시 질서정연한 예전으로 돌아왔어요. 생각해 보니, 별로 한 게 없네요.
김일수<공주영상대학·교수> 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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