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묵처방
백묵처방
  • 박종훈 소장
  • 승인 2006.10.17 00:20
  • 호수 118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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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묵처방
박 종 훈 강진도예연구소장
<예술조형대학·도예과>
왜구에 쫓겨 도망가던
코, 귀 잘린 고려인을 떠올린다

강진은 지금 축제가 한창 무르익고 있다.
우리나라 천년의 비색을 고스란히 머금은 고도(古都),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다섯시간, 또는 비행기로 전남광주에 내려 다시 버스로 한시간 반여를 달려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누가 명명했듯이 남도 답사의 일번지인지라 젊은 그들을 배낭여행으로 유혹할 만한 곳이다.
구불구불한 해안길을 걸으며 걸으면서 영랑의 싯귀하나를 떠올린다. “……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테요 ……” 설움에 잠기다가는 다시 새로운 희망이 싹트는 법, 18년간의 귀양살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금의 환양을 한 정약용선생을 도운 곳이기도 하다.
지금 그 곳에 가면 마음 촉촉이 젖어드는 가을 감상이 더욱 무르 익는다.
대구면에 이르는 해안 언덕에 올라서면 확 트인 바다가 펼쳐진다.
문득 6백여년 전에 왜구가 쳐들어오는 환상에 가득차며 내 마음의 열기가 솟구친다.
내가 이순신이 되고 을지문덕이 되고 대조영이 되었다가 장보고가 되는 환상을 갖는다. 그들은 우리 어른들의 코와 귀를 베어가서 논공행상을 했다지 않는가. 그때의 위정자들의 무능함을 지금의 정치판까지 몰아서 욕하다보면 카타르시스의 물결이 바다로 흘러가 버린다.
너무 흘리다보면 맹탕이 될까봐 얼른 감상을 접고 한을 품어야 성공한다는 옛말을 다시 주워 듣는다. 그래서 제 버릇은 못 고친다나 죽을때까지.
사당리(沙堂里)에 들어서면 확 트인 벌판사이로 우뚝솟은 두개의 산봉우리, 왜구에 몰려 도망가는 우리들을 본다. 나를 본다. 도망가다가 홱 돌아서며 저항의 몸짓을 해보지만 내 손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 다시 돌아서서 도망친다. 가면서 한을 품는다. 내 다시는 이런 꼴을 당하지 않으리.

188기의 가마터가 있는 사당리 한 가마터에서 나는 마음의 제(祭)를 올린다.
비색(翡)이여, 비색이여 나에게 다시 와서 내게 비밀을 알려다오. 그래서 아라비안 나이트의 거인을 타고 일본으로 유럽으로 비색의 청자를 알리고 싶다. 비색의 청자는 우리나라 강진의 흙으로 빚은 색이 유려하다.
경상도 지역은 모래질이 많아 사발로 유명해졌고 전라도 지역의 흙은 미세한 점질의 흙이 많아 청자가 발달 하였다. 그 중에 강진 흙이 으뜸이다. 약간의 철분이 섞인 흙으로 빚고 황톳물을 걸러 천연의 유약을 만들어 구우면 유태색이라고 불리는 속살이 맑갛게 들여다 보이는 비색의 청자가 만들어 진다. 다만 어려운 부분은 불을 때는 과정에서 환원 불이라는 불완전 소성을 맞추는 일이다. 중국은 옥(玉)을 향한 색깔로서 비색(秘色)으로 칭하고 일본의 청자는 감히 엄두를 못 내어 청백자라 명명하는 일본 청자로 변환을 시도하고 있다.
나는 이쯤에서 고려인으로 돌변한다. 왜구에 쫓겨 가면서 가마와 장작을 남겨두고 내륙으로 도망갔었던 기억을 되살린다. 왜 도망갔었던가. 누가 도망치게 만들었는가. 코와 귀를 잘린 그들의 혼은 지금도 떠돌고 있는가.
있다. 있고 말고 우리 작업하는 물레쟁이들 주위에 맴돌고 있다.
“우리 혼을 입으라” 고, “우리 혼을 씌우라” 고, 느끼는 사람만 안다. 그들이 우리의 주위를 맴돈다는 것을. 나는 작업자세를 그들이 내게 잘 들어 올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해본다.
허리를 펴고 뒷통수를 비우고 가슴을 열면 뒤에서부터 들어오기 시작하여 한 몸이 된다. 그리고 춤을 춘다. 흙의 춤을 누가 막으랴 이 즐거운 환희를.
가끔 교가의 첫 소절을 부르면 가슴이 찡하다. “영기찬 백두산에 정기를 받고….” 하다가 복 바치는 설움이 가슴한 구석에 있다. 무엇일까? 무엇일까? 아직도 최고가 되지 못해서 일까? 아직 무슨 한이 있어서 일까? 그렇다 한이 있다.
그들이 쫓겨 다녔던 모습이, 가난의 모습이 다 풀어 헤쳐지지 못했으며 단국의 웅지의 꿈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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