⑬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⑬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 임두빈
  • 승인 2008.03.18 05: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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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프리드리히를 알고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존재의 심연을 열어보이는 형이상학적 상상력이 전무하다시피한 우리화단의 실정에서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번에 소개하는 이 작품도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지면을 통해 선을 보이는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18세기말에서 19세기를 살았던 독일 낭만주의 회화의 대표적 화가이다. 특히 풍경화에 있어서 그가 이룩한 예술적 성과는 그를 독일 낭만주의 회화의 독보적 위치로 올려놓고있다. 그의 풍경화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아카데믹한 풍경화와는 전혀 다른 심리적 상징으로서의 내면적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프리드리히는 청년시절부터 아카데미화풍에 대해서 친근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가 청년기에 교육받았던 드레스덴은 옛 거장들의 그림을 공부하기에 매우 좋은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실제 자연풍경에 눈을 돌려 그것을 소묘하면서 화가로서의 기본적 실력을 쌓았다.

이때에 그가 모은 소묘들은 훗날 프리드리히의 독특한 풍경화를 형성하는 바탕이 되고있다. 프리드리히 회화의 위대성은 결코 조형적 기법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독창적이고 새로운 기법을 개척한 화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회화가 지닌 새로움과 위대성은 내면적 주제설정과 그것을 표출하는 형이상학적 상상력에 있다. 그의 그림 속에는 세계와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사려가 운명적인 우수에 둘러싸여 빛나고 있다.

프랑스인들이 독일 낭만주의 회화의 오묘함에 깊게 경탄했던 것은 바로 프리드리히의 그림에서였던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타고난 고독함과 우울함을 지닌 화가였다. 이 고독한 천재의 우울함은 그림을 감싸고 도는 정서적 기조가 되어있다. 예술가는 그 누구보다도 시대적 정신상황을 가장 민감하게 느끼고 반영하는 법이다. 천재적인 예술가가 그 가장 깊은 곳에서 느낀 내적 우수는 한 시대의 정신상황 속에 밀려드는 깊은 변화와 위기를 예고하는 경우가 많다.

▲ ‘뤼겐의 석회암벽’으로 1918년도 프리드리히 작품

프리드리히가 느낀 내적우수도 바로 시대의 저변에 서서히 밀려들고 있었던 낭만주의적 정신상황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낭만주의는 일종의 반종교적 정신상황이다. 이제 세계와 인간의 삶은 더 이상 신에 의해 질서 잡힌 안정된 것일 수가 없게 되었으며 혼돈과 영원과 신비에 대한 동경이 우주에 있어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한 끝없는 의문과 함께 낭만주의 천재들의 정신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들은 존재의 밑바닥에 있는 무한한 혼돈과 어둠을 직시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그들에게 불안과 허무를 주는 동시에 그들의 삶을 보다 깊고 풍부하게 해주기도 했다. 프리드리히의 그림에 감도는 우수는 이와 같은 낭만주의 정신상황의 반영인 것이다. 뤼겐도의 석회암벽은 그가 44세에 그린 작품이다. 그는 이 그림을 친구와 지인들에게만 보여주고 공개적으로는 전시하지 않길 바랐다고 한다.

이 작품 속에 그려진 풍경은 실제 그대로가 아니다. 그는 자연풍경의 단편들을 그의 내적 의도에 따라 배치하고 변형시켜서 그림을 완성하고 있다. 작품을 분석해 보면 먼저 세명의 인물과 나무에 의해 구성된 근경이 있고, 그 뒤로 석회암벽의 중경이, 그리고 끝없는 바다가 원경으로 펼쳐진다, 근경의 풀밭과 나무는 화면을 원형으로 감싸면서 전체의 구도에 단단한 통일감을 주고 있는데 그 속에 배치된 세명의 인물은 다분히 상징적이다. 붉은 옷의 여인은 협곡의 심연을 손으로 가리키는 듯 하며, 푸른 옷의 남자는 그 깊은 협곡에 현기증을 느껴 쓰러진채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다.

그 모습은 존재의 깊은 곳에 출렁거리는 무한한 어둠을 보고 불안에 젖는 낭만주의 정신의 한 상징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오른편 나무둥치에 기대어 서서 초연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는 프리드리히의 내면에 깃든 영원한 것에 대한 동경을 암시하고 있다. 중경의 뾰족하게 솟아 오른 바위는 시선을 협곡에 집중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중경 전체를 통일적으로 묶어주고 있으며 양옆의 암벽에 의해 바다는 그 심연 전체가 하늘로 치솟을 듯 압도적으로 우리의 시선에 다가온다. 존재의 무한한 심연이 더 이상 가려져 있지 않고 가까이에서 생생히 느껴지는 것, 이것 역시 낭만주의 정조의 한 현상인 것이다.

화면은 전체적으로 볼때 근경의 다소 명랑한 정경과 중경과 원경의 무한한 공간이 자아내는 쓸쓸함과 우수가 상호 조응하면서 심리적 긴장감을 유발하고 있다. 여기에는 현상으로서의 존재세계와 그 영원한 심연의 긴장관계가 낳는 신비에 찬 불안한 정조가 감돈다. (훗날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 잡지 미노타우르에 「낭만주의 불안」의 대표작으로 게재되기도 했다) 우리는 이 그림 속에서 프리드리히의 어떤 작품보다도 진하게 세계와 인간의 삶에대한 깊은 사려가 운명적인 우수에 둘러싸여 빛나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임두빈(대중문화예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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