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실험실의 비히터 속에 존재하지 않아
삶은 실험실의 비히터 속에 존재하지 않아
  • 윤채근 교수
  • 승인 2008.03.18 13:01
  • 호수 12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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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에는 심리분석에 관심을 가진 동료들이 많다. 개중엔 프랑스에서 정신분석 훈련을 파쎄(통과)하고 국내에서 임상분석에 종사하는 전문가도 있다. 학부 시절부터 요란하게 공부했던 인지심리학이나 영미권의 자아심리학에 염증을 느끼고 라캉 계열의 철학적 심리분석 공부에 매진해 왔던 나로서는 이런 동료들을 만났다는 것은 하늘이 준 행운이었다. 말하자면 과학의 탈을 썼지만 지리멸렬하고, 그래서 구체적 나의 실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조언도 해주지 못하는 소외된 심리학에서 구원(?)받은 셈이다.

인지과학자들은 인간의 세계 이해 능력을 낙관하여 일정한 훈련 기제를 프로그래밍시킴으로써 주체를 변형,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자아심리학자들 역시 과중한 초자아(죄의식)의 압력과 이드(본능)의 공격으로부터 자아를 잘 보호하면 건강하고 질서 있는 삶을 회복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나는 나의 자아를 분석하고 해체하는 고통스런 경험을 통해 그런 거짓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삶은 그런 실험실의 비히터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 자신을 분석해 가며 느낀 진실은 이러하다. 인간은 사회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결국 조직 앞에 자신의 주체를 헌납한다. 개인은 교육과 정치의 권력 체계 속에 무릎 꿇음으로써 하나의 문화적 존재로 승인된다. 여러분들도 그러한 절차를 잘 겪었기에 대학인이 되어 이 자리에 서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평생의 상처가 되어 무의식 안으로 봉인되는데, 이 상처를 어떻게 잘 표현해내느냐에 따라 한 주체의 삶이 결정된다. 어떤 사람은 피아노 연주로, 또 어떤 이는 문학 창작으로, 스포츠로, 춤으로, 연구 활동으로, 기도로 이것들을 들춰내어 지금 나는 아프다고, 그러나 잘 견뎌내고 싶다고 통증을 호소한다. 결국 멀쩡해 보이는 평온한 일상 속에서 우리들은 격렬하게 자신의 존재의 통증을 앓고 있는 것이며 그것을 멋지게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 모두는 아주 어린 시절,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자신의 본질의 일부분을, 심한 신경증자의 경우에는 심지어 전부를 포기했던 사람들이다. 그 잃어버린 부분을 회수하기 위해 성인이 된 우리들은 건전한 방식으로 주체를 복원하고자 한다. 그러나 완전한 복원은 있을 수 없고, 게다가 어린 시절의 자기 자신이었다고 믿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실은 실체가 없는 환상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존재론적 고민이 시작된다. 자기라고 믿었던 존재와 현실의 자기와의 괴리, 나아가 자기라는 존재 자체가 허구가 아닐까 하는 염려 등. 이런 불안 속에서 주체는 심각한 열등감과 상실감을 겪지 않을 수 없다.

대학교 새내기들은 앞으로 삶에 대한 심각한 자기 혼란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입학 뒤의 들뜬 여운이 가셔지고 나면 미래의 삶에 대한 고단한 준비 과정에 힘겨워질 수도 있다. 과연 나는 무얼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숨 가쁘게 앞만 보고 달려 얻은 열매가 과연 내가 원했던 그것인지 회의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 연령대라면 누구나 겪어야하는 존재의 결핍감에 시달리면서 그 원인을 주변의 하찮은 것에서 찾고 싶어질 것이다. 그래서 엉뚱한 사실과 사람에 미움과 불안을 전가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비겁하고 나약한 짓인 줄도 모르면서 거짓 사랑과 진실이 결여된 교제에 매달리다 또다시 상처받게 될 것이다.

나는 여러분들이 상처받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 모두는 이미 상처로부터 태어난 존재들이고 인생이란 것이 상처 없이는 한시도 굴러가지 않는 조금 녹슨 기계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여러분들이 숙명처럼 떠안고 가야 할 상처를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를 기르라고 말해주고 싶다. 상처는 완전히 치유되지도 더욱이 잊혀지지도 않지만 그것을 직시하여 회피하지 않는 한 치명적이지는 않다. 그 용기 속에서 내 상처를 감내하면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기적의 마음도 움틀 수 있으리라.

윤채근 (한문교육과 교수)

윤채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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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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