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모의 일생
참모의 일생
  • 장현철 동우
  • 승인 2008.04.15 08:57
  • 호수 12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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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조자룡 일대기를 재구성한 영화 한편을 관람했다. 조자룡이 70대 노인이 되어서도 촉나라 군사를 이끌고 눈발이 흩날리는 가운데 북벌에 나서는 장면을 보면서 시종 떠나지 않았던 생각이 ‘참모의 일생’이었다. 오로지 주군의 대의를 위해 숱하게 명멸한 동지들의 갑옷을 씁쓸히 바라보던 조자룡의 눈동자는 처연했다. 그리고 결국 인생이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며 전쟁터를 누빈 30여년간의 삶이 허망하다고 결론 내린다. 자기가 없는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럴지 모른다. 선우후락(先憂後樂). 근심할 일은 남보다 먼저하고, 즐거워할 일은 가장 늦게 누리는게 가장 멋진 참모다. 그래서 좋은 참모는 공을 세워도 자기 공으로 돌리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 주군이 강을 건너면 뗏목을 타고 다시 돌아온 길로 떠난다. 다시 부름이 없으면 그만이다.

타고난 천성이 박약해 범부를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의 일생은 둘로 나뉜다. 주군을 만나서 살아가는 삶과 주군을 만나지 못한채 죽어가는 삶이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충성을 다하고 때로는 죽음마저 불사하는 인생은 값지다고 말한다. 좋은 주군을 만나면 그것대로, 설혹 그렇지 않다해도 가슴에 두근거리는 그 누구를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질수 있다면 한 평생 후회가 없다는 것이 소위 ‘참모 이상론’이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다. 주군은 자기의 이상을 펼치는 도구일 뿐이다. 권력에 접근하는 통로일 뿐이다. 최근 정치판 참모들을 보면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씨 등이 활개치던 3김 시대와 매우 다른 점이 눈에 띈다. 우선 소위 주군을 모신 기간이 완연히 다르다. 3김 시대 참모들은 대다수가 20여년간 자기 지도자를 가까이에서 보좌한 사람들이다. 최근에는 대통령을 지낸 사람들 중 10년 이상 보필한 사람이 거의 없다.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생활하던 때부터 곁을 지켜온 사람은 한두명에 불과하다. 대통령과 만난지 2~3년도 안된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3김 시대와 달리 살아온 여정이 다르다. 배고픔이 없다. 추위 없이 온실 속에서 머리만 빌려 준 경우가 많다. 거친 바람을 뚫고 폭설을 같이 맞은 사람은 동질감이 넘친다. 참모는 주군의 속내를 훤히 읽고 변하지 않은 충성심으로 보좌한다. 어려운 시절의 정서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주군의 눈빚만 보아도 해야 할일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햇볕을 받으며 온실속에서만 함께 했던 주군과 참모 관계는 비장함이 없다. 만남이 쉬웠듯이 결별도 어렵지 않다. 주군이 빚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정치인들의 배신이 당연시되고 있다. 전직 경찰청장이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의 뒤통수에 온갖 험담을 일삼고 돌을 던져도 그 누구하나 꾸짖지 않는다.

숱한 후일담을 남기고 18대 총선이 막을 내렸다. 여러 특징 가운데 하나가 대통령 측근들의 몰락이다. 바야흐로 칼집을 잡았는데, 칼을 꺼내기도 전에 하산해야 한다니 떨어진 사람들은 원통할 것이다. 대통령과 명콤비로 생각하는데, 뜻을 펼칠 기회를 잃었다고 생각하면 답답하기 그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볼 일이다. 과연 선우후락의 자세로 주군을 모셨던가. 주군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헤아리고 태산처럼 무거운 자세로 뜻을 받들었는가. 아니면 주군을 한낮 자신의 출세를 위한 나룻배로 생각했는지 곰곰이 되새겨 볼일이다.

장현철 동우
장현철 동우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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