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민화-책거리그림
20) 민화-책거리그림
  • 임두빈 교수
  • 승인 2008.05.20 15:40
  • 호수 12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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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거리그림의 의의와 현대적 조형성

 


책거리 그림은 학문을 숭상했던 우리 겨레의 생각이 낳은 독특한 민화이다. 여기에는 많은 책들과 붓이나 어의, 종이, 벼루, 또는 꽃과 과일, 악기종류와 안경 및 새와 토끼 등이 책과 함께 그려진다. 민화 중에서도 책거리 그림은 그 독특한 조형성으로 인해서 매우 가치있게 여겨지고 있다.

책거리그림의 구성
첫째, 책거리 그림은 화면 전체의 구성적 측면이 매우 현대적이다. 화면에 등장하는 물상(物像)들은 각기 그 고유의 장소성과 현실성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나와 화면속의 구조적 조형미를 연출하기위한 기능적요소의 하나로 화하는 것이다. 책거리 그림이 마치 현대의 입체파 회화와 유사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점에 기인한다. 입체파 회화에서도 화면에 등장하는 각 사물들이 그 고유의 존재성에서 떨어져 나와 새롭게 화면을 구성하는 순수조형의 구조적 요소로 화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가 있다.

책거리그림과 색채효과
둘째, 책거리그림에서의 색채는 대부분 원색적이다. 사물이 지닌 고유한 색채보다 훨씬  강하고 밝은색이 각 사물의 형태 속에 칠해지고 있는 것이다. 색채추상화적 요소를 책거리그림에서 발견하고 있는 것도 그 점에 기인한다.

자유분방한 다시점
셋째, 특정한 시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시점(視點)의 이동현상을 보이고 있다. 즉 다시점(多視點)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책거리그림의 다시점은 넓게 보면 정통회화(正統繪畵)에서 볼 수 있는 다시점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민화는 정통회화보다도 더욱 자유분방한 다시점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다시점의 특징을 보이고 있는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우리와 다른 서구문화권의 회화는 르네상스 이래 일시점(一視點) 원리를 최고의 시점원리로 존중해왔다. 그들 문화권의 뛰어난 회화는 일시점에 의거한 대상파악을 기본으로하는 논리적 시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비해 우리의 동양화에서는 시점이 이리저리 이동해 나아가는 다시점을 중요한 시형식으로 존중해온 역사를 지닌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시형식을 보이게 된 데에는, 자연과 우주를 바라보는 두 문화권의 사상적 시각의 차이가 절대적 원인이 되고 있다. 동양은 그 사유형태의 근원이 불교사상과 노장사상 및 유가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신비적 직관에 의거한 통합적이고 종합적인 세계의 전체상을 지향하는 경향을 강하게 보이고, 서양은 주객분리의 대립적이고 분석적이며 분할적인 사유형태를 강하게 들어내 보이고 있다. 그로인해서 동양은 자아의 개별적 주관성보다 세계와 하나됨으로 있는 전일성(全一性) 내지 합일성이 주요시되고 현상과 실체의 이분을 용납치 않는 전원적(全元的)일원론(一元論)을 보여주고 있으며, 서양은 세계와 자아를 대립관계 속에 놓여있는 것으로 보고 자아의 주관성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서양적인 사고에 의하면 ‘나’는 우주 만물과 별개의 것으로 존립하면서 만물을 타자(他者)로서 바라보는 주관성이지만, 동양의 사유 속에서 ‘나’는 우주만물과 하나로서 일체화된 ‘나’인 것이다. 이러한 사고태도는 그대로 회화양식에 반영되어 서양에서는 그리는 자의 시점과 자연경관이 어디까지나 대립관계에 놓여짐으로써 ‘나’라고 하는 한 시점의 정지된 주관성이 강조되는 일시점 원리의 회화양식이 이루어졌던 것이며, 동양에서는 ‘나’와 ‘자연’과의 합일적 관계 속에 회화에 있어서 그리는 자의 시점이 자연경관 속에 일체가 되어 그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여 나아가는 다시점의 유동성을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민화에서 볼 수 있는 다시점 현상은 정통회화에서 볼 수 있는 ‘나’와 ‘우주’와의 합일적 관계에서 비롯된 시 형식의 일부를 반영하는 것이면서, 보다 정확하게는 ‘나’라고 하는 개별적 주관성이 소실되는데서 비롯된 주체와 대상과의 미분화 상태에서 나온 다시점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민화는 정통회화에서 보다도 훨씬 자유분방한 시점의 이동 현상을 한 화면 속에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좌우상하로 거침없이 시점을 이동해 가면서 사물을 포착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 그림 속에 여러 개의 시점이 동시에 존재함으로써 그려진 대상물들은 현실적인 물체감위에 여러 상황의 관념적 공간들이 동시에 펼쳐져 보이는 신선한 복합상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은 다시점에 의한 사물 포착법은 몇몇 책거리그림들에서 마치 현대의 큐비즘(Cubism)회화와 유사한 분위기의 양식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책거리그림의 현대적 조형성
책거리 그림은 그 구성적인 측면에서 기하학적 추상미의 요소를 듬뿍 지니고 있다. 특히 수많은 책들만으로 이루어진 책거리 그림은 그것 자체가 그대로 현대회화로 평가되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탁월한 현대적 표현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책거리그림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수직과 수평선의 다양한 짜임으로 이루어진 기본적인 구조의 틀은 그 틀을 메우고 있는 원색조의 강렬한 색채와 어울려 마치 신조형주의 화화에서와 같은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책거리 그림은 거기에 그려진 물상들 하나하나가 현실적인 연관성을 떠나 새로운 공간질서를 부여받고 그려짐으로써 독특한 형태성과 장소성을 지니게 된다. 난데없이 책이나 안경, 악기 등이 공중에 떠 있다든가, 하나의 꽃병이나 사물들이 어떤 부분은 입체인데 다른 부분은 평면으로 그려져 있는 것 등, 현실적인 형태성을 왜곡 변형함으로써 타성적인 시각적 관습에 충격과 자극을 주어 신선한 시각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형이상학파 회화에서의 불가사의한 정조와 입체파 회화에서의 형태구성의 신선함이 결합된듯한 새로운 회화표현상의 감흥을 느끼게 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우리 겨레 고유의 정서가 넘쳐흐르고 있으니, 책거리 그림에서 우리는 전통과 현대의 깊은 결합상 내지 전통의 현대적 표현에 대한 창조적 발상의 한 부분을 시사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

 (임두빈, 한국의 민화Ⅳ, 서문당, 1993) 

임두빈 교수
임두빈 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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