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신(民信), 교신(敎信)
민신(民信), 교신(敎信)
  • 김남필(대외협력실·홍보팀 팀장) 동우
  • 승인 2008.07.22 01:19
  • 호수 12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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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지성인의 자화상은?

공자(孔子)에게 제자 자공(子貢)이 묻는다. “정치란 무엇입니까?” 공자는 세 가지를 들어 정치의 도리를 설명한다. “백성의 끼니를 해결하는 것, 병사를 길러 나라를 지키는 것, 백성의 믿음을 얻는 것이다” 자공이 “셋 중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합니까”라 묻는다. “병사를 기르는 일(足兵)이다.” 다시 묻는다. “그럼 나머지 둘 중 하나를 버린다면?” “백성의 끼니(足食)이다.” 공자가 덧붙인다. “모름지기 백성의 믿음이 없이는 나라도 서지 못하는 법이다(民無信不立).”

논어의 안연(顔淵) 편에 나오는 ‘족식, 족병, 민신(民信)’론이다. 정치에 관한 공자의 이같은 식견을 대학의 입장으로 치환한다면 어떨까? 대학의 발전에 필요한 세 가지를 들어보자. 그 하나는 족식, 대학 재정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족병, 대학의 외적 변화에 대응할 대학의 교육제도 혹은 교육시설일 것이다. 그렇다면 민신은 무엇에 해당할까? 대학 구성원의 믿음,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 사회로부터 믿음을 얻는 일은 아닐까? 공자의 논지를 따른다면 대학의 재정이나 시설이 아무리 훌륭해도 사회의 믿음을 잃는다면 대학의 안위도 가늠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국가를 이끄는 정치가 결국 백성의 믿음을 얻고, 만드는 일이라면 대학은 더욱 그러하다. 대학의 태생이 궁극적이고도 절대적인 신뢰의 원칙, 즉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불변의 원칙을 밝히는 일이 대학의 본분이기에 정치보다 더욱 대학의 신뢰는 중요하다.

공자가 지적한 정치의 존재기반이 민신(民信)이라면, 대학의 존재기반은 결국 교신(敎信)인 셈이다. 신뢰받지 못하는 대학교육은 그 겉모습이 아무리 화려해도 결국 공염불인 셈이다. 신뢰받는 대학을 만드는 첫걸음은 결국 교육과 연구의 윤리에서 비롯된다. 정치가 나라와 백성을 앞세우고 사리(私利)를 충족할 때 백성의 믿음을 잃듯이 우리 대학인 역시 고결한 학문의 가치를 앞세우면서도 그 속내에 아집과 이기의 탁류가 흐를 때 신뢰를 잃게 된다.

연구업적 평가가 없어도 대학의 논문, 저서 생산은 다른 무엇보다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 그 논문의 생산방식은 치열한 독서, 실험, 검증, 토론과 비판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나 대학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대학 평가를 앞두면 연구업적의 확대를 위한 유인정책, 지원대책이 강구되고, 때로는 실적 부풀리기를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고심한다. 그럼에도 표절 시비와 부실 논문에 대한 비난을 사회로부터 공공연하게 받고 있다.

학생들은 리포트를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작성하고, 독서를 게을리해도, 심지어 컨닝을 해서 학점을 취득하고 장학금을 받아도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책을 읽지 않는 대학생이라는 말은 이제 화제로 끼지도 못할 만큼 일반화되어 그 시정대책을 논의할 수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우리 대학인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대학 바깥의 일에 삿대질을 하고, 비아냥을 하면서 우리가 지금 저지르고 있는 부실과 비양심, 비윤리의 교육과 연구에 대해 자책하거나 심각하게 반성하고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두렵지 않은가. 우리가 만드는 대학의 모습, 우리가 만들어내는 지성인의 자화상이. 대학은 날로 커지고, 그 시설과 재정규모도 커지는데 우리 대학인의 속내는 기원전 500년의 지식인들의 모습, 2천 5백년 전의 한 서생의 고민에 발끝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두렵고, 부끄럽다. 지금 내가, 우리가 만들어가는 대학 지성사의 단면이 일개 시장의 상도의만도 못한 믿음과 신뢰를 받고 있는 현실이. 신뢰받는 대학 교육이 없다면 대학의 미래도 없다는, 교무신불립(敎無信不立)의 대오각성이 목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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