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곡물논쟁’과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
⑥‘곡물논쟁’과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
  • 서문석(경제) 교수
  • 승인 2008.11.04 13:45
  • 호수 12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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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최고의 경제학자’로 찬사

분유에서 시작된 ‘멜라닌 공포’가 이제는 음식물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더욱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이 공포가 어디까지 확산될지 예측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그동안 더 많은 이윤을 찾아 떠돌아다녔던 우리들의 욕심의 궤적을 모두 되짚어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정부가 나서서 수입을 제한하고 있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당장 해외에서 저렴한 농산물의 수입이 중단되면 서민들이 다니는 식당들은 문을 닫거나 가격을 대폭 올려야 할 것이다. 물론 식당들이 싼 재료를 사용해서 폭리를 취했을 가능성을 배제한다면 말이다.

폭등한 음식 값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수입을 재개하여 다시 저렴한 수입식품들을 먹게 해달라고 정부에게 요구해야 할지도 모른다. 곡물의 수출입에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논쟁은 19세기 초반 영국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곡물조례논쟁(穀物條例論爭)’을 꼽을 수 있다.

이 논쟁에 등장하는 ‘곡물조례’란 소맥가격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될 때까지 외국산 곡물의 수입을 금지시킨다는 것이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곡물의 생산자는 줄어드는 데에 비해 곡물의 소비자는 급속하게 늘어났다. 여기에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 등으로 대륙으로부터의 곡물수입이 중단되자 곡물가격이 급등하였고 그 결과 지주들은 큰 이익을 얻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나폴레옹전쟁이 끝나고 대륙으로부터 곡물 수입이 재개되자 곡물가격은 급속하게 하락하였다. 많은 이익을 누리던 지주들 중에서는 파산하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지주계급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의회는 곡물조례를 제정했던 것이다.

이 곡물조례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폐기를 외쳤던 경제학자가 바로 리카도(David Ricardo, 1772.4.18~1823.9.11)였다. 그는 경제학의 뿌리를 형성했던 고전학파를 완성한 경제학자로 불리고 있으며 마르크스로부터 최고의 경제학자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로 경제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학자이다. 당시 지주들은 지대가 높기 때문에 곡물가격이 비싸진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해외로부터 곡물을 수입한다고 하더라도 곡물가격이 하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리카도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곡물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농사를 지어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지대가 높아진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곡물을 수입하여 곡물가격을 낮추면 지대까지도 하락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곡물조례의 폐지를 주장한 것이다.

리카도의 이런 주장은 공장을 경영하던 산업자본가들에게 크게 지지를 받았다. 곡물가격이 하락하면 임금을 저렴하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경제체제가 확립되어 이런 논리가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이 되자 곡물의 수입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19세기 중반이 되면서 곡물법이 폐지되고 곡물 수입이 재개되었다. 이렇게 당연한 일이 이제 와서 문제가 되는 상황을 보면 그동안 정부는 국민의 건강을 위해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을 놓치고 있었던 셈이다.

서문석(경제) 교수
서문석(경제) 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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