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대신문 연중기획 ⑩ 역사읽기의 즐거움
단대신문 연중기획 ⑩ 역사읽기의 즐거움
  • 김명섭(사학) 강사
  • 승인 2009.05.21 14:27
  • 호수 12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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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오늘과 내일을 제대로 보기 위한 현실 학문
현실의 늪에서 길을 잃었을 때 역사가 방향 제시

기획 편집진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사실 ‘역사읽기’는 그다지 즐겁지 못하다. 아니 괴롭기까지 하다. 물론 지금 절찬리에 방영 중인 KBS-TV의 《천추태후》나 SBS의 《자명고》에서 멋진 여전사들이 훨훨 날아다니며 장엄한 영웅담을 엮어가는 걸 보면 즐겁고 뿌듯하다. 또 지난해 전국을 강타한 고구려와 발해 붐 속에서 주몽과 연개소문, 대조영, 이순신 등이 멋지게 수십만 대군을 물리칠 때 통쾌함을 금할 수 없다.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가 아닌 현실 속에서 만나는 한국의 역사는 장엄이나 통쾌와는 거리가 먼, 답답함과 무기력감을 안겨준다. 중국에서 고구려성이나 발해 유적을 중화의 소수민족 유산이라 자랑한다거나 일본에서 여전히 독도를 다케시마라 우기는 일은 이제 ‘괴로운 일상’이 되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인근 바다를 자신들만의 것이라 하지 않는데도, 유독 ‘일본해(Sea of Japan)’라는 자국명을 쓴 지도를 고집한다거나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수 천만명이 희생과 고통을 당했는데도 최소한의 평화를 지켜온 헌법을 없애려 할 때는 인간적 환멸감조차 느끼게 한다.

누구나 자기 조상이나 가문과 혈통을 자랑스러워 싶어하고, 세계를 주름잡던 좋았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또 남에게 치욕을 당한 일이나 괴롭혔던 부끄러운 역사는 감추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기에“현재를 지배한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는 경구처럼, 냉소적인 일부 역사학자들은 오직 전쟁이나 정쟁에서 이긴 자, 즉 승자들의 기록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 스스로 역사가를 권력자의 시녀, 또는 “쓰레기 처리장 주인”이라 폄하하기도 했다.

정말 우리에게 역사란 내가 기억하고 싶어하는 것만을 모은 한편의 드라마이거나, 철저하게 패배자의 기록을 없앤 승자만이 누릴 수 있는 전리품이란 말인가. 이런 좌절감에 빠질 때, 우리는 궁형을 당하면서도 굳이 살아남아 당대의 기록을 모은 사마천의 지혜를 만나야 하고, 단지 몇 글자 때문에 죽음으로서 국왕들과 맞섰던 조선시대 사관들의 기개를 배워야 한다.

심지어 정벌군의 일원으로 전장을 헤맸던 헤로도토스는 “서로 전쟁을 벌였던 원인이 사람들에게 알져지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역사의 의미를 새겨 주었다. 그러니 역대 황제나 예비 관직자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이 자신들의 역사과목이면서도 제일 경계했던 인물들이 바로 사관이었던 것이다.

사실 역사공부는 오늘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나 잘못된 과거를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과 내일을 제대로 보기위한’ 현실학문임에 분명하다. 고대 그리스 역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붕괴와 공산주의의 미래를 점칠 수 있었던 것이나 엘빈 토플러 등 많은 미래학자가 사실 역사학자 출신이라는 점은 과거가 더 이상 죽어있는 학문이 아님을 반증한다.

누가, 어떤 시각으로,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과거는 ‘미래를 여는 오늘의 열쇠’일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 나라의 국경이나 민족의 구별이 무의미해지며, 인터넷과 우주선이 날아다니며 종이조차 사라지고 있을 때, 여전히 철지난 과거에 대한 역사읽기는 유효한 것인가.

흔히 나그네가 길을 잃었을 때 밤하늘의 북두칠성을 보라고 한다. 현실의 늪에서 길을 잃거나 막막한 벽에 부딛쳤을 때, 앞에 바위처럼 막막한 고난과 역경에 부딪혔을 때, 옛 선인들의 지혜와 교훈을 통해 혜안을 얻는 것은 어떨까. 아마도 그것이 역사읽기의 진정한 즐거움이 아닐까 한다.

김명섭(사학) 강사
김명섭(사학) 강사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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