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에게 쓰는 편지
후배에게 쓰는 편지
  • 박시은(과학교육·09졸)
  • 승인 2009.05.21 18:14
  • 호수 12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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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4학년 때 널 만났으니, 휴학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2학년이겠구나. 눈에서 멀어졌다고 마음에서도 멀어진 것은 아닐 텐데, 졸업을 하니 역시 연락 하는 것이 힘들어지네. 요즘은 혼자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조금은 쓸쓸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이럴 때일수록 같이 밤을 새워 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던 날들이 더 그리워진단다.

솔직히 말하면 너의 성장통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웠어. 정신의 젖니가 빠지고 간니가 나는 가슴 아픈 1학년의 시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 때 나는 무슨 생각으로 성장통을 견뎠나…’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나도 해결하지 못했던 정신적 성장의 고민들을 들으며 선배라는 의무감에 답을 해 주던 내 모습이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만 하네.

사실은 나 스스로도 그런 혼란스러움이 싫어서 피해 왔던 감정들인데 너를 통해 늦게나마 성장통을 겪게 된 것을 오히려 다행스레 받아들이기도 했단다. 그러한 감정들을 ‘어차피 지불해야 할 인생의 청구서’라고 생각하니, 그동안 밀렸던 연체료마저도 기쁘게 낼 수 있더라. 내가 대학에 들어와서 꿈꾸던 성장이라는 것은 대부분 이성의 세계에 속한 것들이었거든. 의무와 책임에 있어서, 그리고 양심과 선의와 같은 것에 있어서 조금 더 완성된 사람이 되고 싶었어.

그러한 것들이 최소한 대학에서 이뤄야 할 가치라고 생각을 했었지. 마치 서점에 즐비한 성공을 위한 책들에 나와 있는 내용들을 몸소 실천하겠다는 듯, 뭔가 설레고 피를 끓게 하며 유혹하는 감성의 세계에는 눈도 돌리지 않았지. 내가 혼란스럽다며 피해 왔던, 하지만 너를 통해 만났던 세계가 바로 감성의 세계였던 거란다. 대학 4학년, 한창 취업을 준비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야 할 시기에 뒤늦게 찾아온 성장통을 겪으면서도 그런 아픔을 피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 당시 다시 읽은 『데미안』덕분이었던 것 같다.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어. “내가 볼 때 우리는 전체를 섬기고 신성하게 생각해야 해. 인공적으로 떼어 놓은 허용된 반 쪽이 아니라 전체를 말이야.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동시에 악마에 대한 예배도 해야 해.” 책을 읽으며 내가 놓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단다. 성장에 방해가 된다며, 또는 혼란스럽다며 피했던 인간적인 감정들 -사랑, 갈등, 흥분-이 사실은 나의 성장을 막고, 나를 더 힘들게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

이성적으로 완벽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남들에게는 독한 사람이 돼 가고 있었고, 4학년 쯤 되니 나는 인간미가 부족해 외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단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좌충우돌 하고 있을 나의 후배. 내가 연체료까지 지불해가며 얻은 성장의 의미는 ‘이성과 감정의 균형’이란다. 자유롭지만 책임을 질 줄 알고, 복종하지만 비굴하지 않으며, 성실하지만 노예가 되지 않는 사람.

마치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동경하는 아브락사스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 말은 쉬운데 이성과 감정의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외줄타기를 한다는 것이 참 힘든 것 같다. 그래서 후배에게 꼭 부탁하고 싶단다. 사회에 나오기 전에 대학에서 외줄타기 하는 연습을 좀 해서 나왔으면 한다. 대학에 등 떠밀리듯 나와 사회에서 뒤늦은 성장통을 겪으려니, 먹고 사는 눈앞의 문제가 급급해 자주 외줄에서 떨어질 때가 많다. 그래서 속상하고, 또 그래서 네 생각이 이렇게 자주 나서 편지를 쓰게 된다. 고맙고 대견한 후배가 그리운 5월이구나.

박시은(과학교육·09졸)
박시은(과학교육·09졸)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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