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영혼 - History Lesson - 문제를 끌어안는 것에 대하여 : Claude Lanzmann(끌로드 란츠만)의 사례
공간의 영혼 - History Lesson - 문제를 끌어안는 것에 대하여 : Claude Lanzmann(끌로드 란츠만)의 사례
  • 이원상(도시계획·부동산·05졸) 대한주택공사 주택도
  • 승인 2009.08.02 22:01
  • 호수 12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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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끌어안는 것의 어려움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견해를 성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지하철 안에서 나는 2차대전 유대인학살에 대한 화두를 평생 끌어안고 작업했던 다큐멘터리스트 끌로드 란츠만의 인터뷰 내용을 읽고 있었다. 끌로드 란츠만은 1974년 나치스의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주제를 평생의 화두로 천착한 인물이다. 옆에 있던 친구는 왜 하필 대학살 따위에 관심을 갖느냐고 물었다. 봄이 시작되고 있었고 화기애애한 모임을 위해 이동 중이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은 당연한 것처럼 들렸다. 나는 단지 “내가 겁이 많기 때문인 것 같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대답이 아니었다. 절멸의 살육현장 속에서 집단적 국가기제가 가지고 있는 학살의 추동 방식과 그 실천적인 계획의 무자비성, 인간의 이면적 탐색을 가능하게 하는 온갖 장면들이 집결되어 있는 이 주제는 내 평생의 관심사처럼 굳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끌로드 란츠만


‘쇼아’라 명명된 이 사건은 ‘역사기술에서 매우 중요한 논쟁의 자리’이며, ‘역사학자들 중에서 사료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반유대주의적 입장의 실증주의학파에서는 아우슈비츠는 날조’된 사실이라는 견해가 있을 정도로 첨예한 이견이 대립하고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런 화두의 중심부로 진입할 때 윤리와 태도의 문제가 겹쳐지고 자신의 입장이 외부인의 시선에 머물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좌절부터 시작해야 할 때는 고민의 시작부터 힘겨워진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인인 내가 이 문제를 서울에서 고민하기 시작할 때 문제로의 진입 자체가 곤란할 때가 있다. 란츠만은 전 유럽을 돌면서, 혹은 절명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북미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린 까닭에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 바다를 건너 낯선 땅으로 생존자들을 만나러 갈 때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시작된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란츠만은 아우슈비츠의 특별 노무반 생존자와 조우하였다. 여기서 특별 노무반이란 신체 건장했기 때문에 죽음을 모면하고 죽음의 수용소에서 시체처리 등의 작업에 동원되었다는 뜻이다. 이 생존자는 1944년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자마자 화장난로로 끌려 갔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고 학살은 더욱 가속화 되었으며, 죽음을 처리하는 과정은 속전속결의 대량처리 과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치스는 유대인을 가마 속이 아닌 커다란 웅덩이 속에서 태웠다. 이 남자는 현장에서 지옥의 불구덩이를 목도한 것이었다. 여기서 문제가 제기된다. 란츠만은 이 남자의 이야기를 영상화하기 위해서 인터뷰 방식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는 일상생활 속에서 갑자기 자기 스스로가 역사의 증언물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또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이 남자를 역사의 증언자에서 배우로 전이시킬 수 밖에 없는 문제가 있었다. 필립 뮬러라는 이 남자가 체코인 가족의 살육 장면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그는 한참을 말하지 않고 있었다. 사흘만에야 그는 입을 열었고 비로소 필름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언술은 중단되기 일쑤였고 그 때마다 카메라가 꺼져야 했다. 이야기의 연결은 불가능할 만큼 개연성을 잃고 있었고, 언술을 구성하는 방식에서 작가는 그것을 구성하는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는 모든 쇼트가 일관성을 잃어버릴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350시간의 필름을 이런 방식으로 돌렸다. 이 350시간 중에는 대략 100시간 정도는 커트해야 할 부분이었다. 말하지 않는 쇼트나 인터뷰의 첫머리나 잘 찍히지 않는 부분, 이것은 기술적인 문제처럼 보였지만 이런 것은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었다. 민족 사멸의 직접적인 증인들을 찾아가는 여정자체가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으며, 공간을 중심에 놓고 각 지역을 소개하며, 생존자를 추적할지 등 수많은 질문들을 끌어들여야만 했다. 화두를 끌어안기 시작한다는 것, 문제를 사유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그 문제를 몸으로 체득하는 과정을 배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2005년 제네바에서 진행된 학살을 주제로한 컨퍼런스 : 유럽에서 학살은 시사저널에서 끊임없이 섹션으로 다뤄진다.


란츠만은 말한다. “모습이 변해버린 몇몇 장소, 일종의 기억 속의 장소와 다른 장소가 되어버린 장소도 있었다. 지도도 몇 장인가 있었고 가스실로 내려가는 사람들의 석고 모형도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오늘날 남아 있는 풍경이나 지도, 모형을 사용해서 촬영한 셈이다. 지도를 보고 오늘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다. 또 이 영화는 오늘날의 모습에 대한 몇 가지 말에 근거하여 가스실로 옮겨가는 영화이다.” 흥미로운 점은 란츠만이 공간을 고민의 좌표로 설정한 대목이다. 문제를 끌어안는 것의 어려움이란 이렇게 자신의 견해를 어떤 좌표 위에 설정할 것인지를 설정하는 그 설계법과 설계법을 기초로한 도면과 지도, 그리고 나침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이 견고해지려면 자신의 견해가 성장해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청초한 봄날에도 우리는 골몰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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