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년 된 ‘단대신문사 기자증’
48년 된 ‘단대신문사 기자증’
  • 취재1팀
  • 승인 2009.08.04 19:05
  • 호수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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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MT사진, 67학년도 수강카드 발굴

삼선개헌반대 단국인 시국선언문의 발굴에 이어 5·16(1961년) 당시 본보의 ‘기자증’과 ‘학생증’, 국어국문학과의 봄소풍(현재의 MT) 사진이 발굴됐다.

본 사료들은 우리 대학 김춘호(국어국문·60학번) 동문이 소장해 오다 대외협력실 교사자료팀의 ‘교사자료 기증운동’을 접하고 지난 17일 본보를 방문, 기증했다.

단기 4294년 4월 1일 발급 된 ‘단대신문사 기자증’(사진 좌)은 당시 우리 대학 문리과 대학 초대학장을 지낸 김용호(金容浩) 사장의 명의로 발급되었으며 당시의 급박했던 시대상황을 대변하듯 바로 당일 ‘신분증명서’(사진 우)로 바뀌었다.

김 동문은 “1960년 4·19 이후 언론사가 창궐하고 그에 따라 사이비기자들의 전횡이 사회문제화 되자 군사정부의 통제가 강화되어 기자증이 신분증으로 바뀌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학생기자들이 국민의 초근목피(草根木皮·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끼니를 해결함) 해결책을 주제로 장면 국무총리를 인터뷰했는데 총리실을 통과할 때 단대신문사 기자증을 제시하면 통과됐다”며 “학생기자증도 그 정도였는데 일반 기자증은 어떠했겠냐”고 반문했다.

김 동문은 당시의 우리 대학 분위기에 대해 “입학 직후부터 4·19로 인해 대부분의 학생들이 수업보다는 시위현장으로 나갔다”며 “그 다음해에는 5·16 군사정부의 학원탄압으로 휴교를 밥 먹듯 했다”고 전했다.
우리 대학은 1961년 5·16 군사정부의 대학정비법에 의해 폐교(단국대학교 60년사 상권 117페이지부터 참조)조치되는 아픔을 겪은 바 있다. 

김 동문은 기자증과 함께 당시의 학생증, MT사진 1장(사진 중)도 기증했다. 1960년 6월6일 정릉에서 가진 국어국문학과의 MT 사진에는 김용호 학장과 김석하 교수, 김 동문의 모습이 보인다.

김 동문은 1962년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출발 직전>이 입선하여 재학 중 등단하였으며 1973년에는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산촌일기>가 당선되었다. 이후 서울신문 기자를 거쳐 <주부생활>, <샘터>의 편집부장, <여원>의 편집국장, 1990년 카톨릭문화대상 출판부문 대상을 수상했으며, 단국문인회 회장을 역임한바 있다.

한편 강재철(국어국문) 퇴계기념중앙도서관장은 이날 김 동문과 함께 배석해 1967학년도 2학기 국어국문학과 과목별 수강카드 25매를 기증했다.

강 관장은 “김석하 교수님의 저서를 뒤지다 발견해 그동안 보관해 오다 내놓게 되었다”며 “아주 작지만 이러한 자료들도 우리 대학 학사행정의 일부분이 될 듯 싶어 기증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강 관장이 기증한 과목별 수강카드는 당시에 재학생들이 수강신청할 때 일일이 수기로 작성해 제출한 것으로 소속, 학년, 번호, 성명, 수강과목, 담당교수를 적고, 담당교수확인과 교무처의 수강신청 확인을 받아야 수강할 수 있게 되어있다.

이날 김동문과 강 관장은 당시 우리 대학의 교수진에 대한 추억의 시간도 가졌다. 당시에 우리 대학에는 “황산덕, 이어령, 차하준, 김방한, 이기백, 양주동 교수 등 명망 높은 교수들이 강의를 나왔었다”며 “이 분들의 강의가 있는 날에는 교외에서 청강생이 몰려 조금이라도 늦으면 강의실 밖에 서서 강의를 들어야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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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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