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바보를 꿈꾸며
위대한 바보를 꿈꾸며
  • 김남필 동우
  • 승인 2009.08.13 19:17
  • 호수 12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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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상실이다. 되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기에, 그것은 아프다. 그가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가난에 찌들은 유년시절 칡을 캐기 위해 올라야 했던, 살기 위해서 올라갔던 고향 뒷산을 그는 죽기 위해서 올라갔다. 되돌이키지 못할 길, 남는 자에게 너무도 큰 아픔을 줄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는 그가 몸을 던져 죽음과 손잡을 만큼 그의 절망은 컸던 게다.
재임 시절 그는 “못해먹겠다”는 말을 여러번 되뇌였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스스로 지역감정의 벽을 뚫고 싶어 기득권을 버리고, 거대한 권위정치(군사독재정권과 3김을 포함한)의 바위를 깨고자 ‘맨땅에 헤딩’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바보 노무현’이 되었고, 결국은 대통령 당선이라는 대반전을 이뤘다. 그러나 정작 거대한 기성의 벽은 그가 대통령이 되고나서 그 무게와 힘을 더욱 여실히 드러냈다. 재벌 혹은 강남으로 상징되는 부의 확대 재생산 구조, 사유화된 거대 언론의 힘, 비민주적 정치구조에 기생한 각 단위 조직의 권위자들… 팔짓 한번, 발길 한번마다 마치 무거운 납덩어리의 그물같은 독점적 기성권력이 그의 행보를 옥죄기만 했다. 그래서 그는 “못해먹겠다”고 화를 내며 길을 걸어야 했다.
나는 그의 정치적 지지자가 아니지만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우리 조국의 희망이라는 점에 공감하고 있었다. 정치인 이전에 한명의 인간으로서 노무현은 그 존재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희망이었다. 유복하지 않은 집에 태어나 명문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권력의 양지에 기생하지 않고도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그의 온전한 인내와 실천력, 그리고 그를 국가의 리더로 길러낸 우리 사회에 그나마 희망이 있음을 억지로라도 믿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싸웠다. 개혁을 통해 사회의 건강성을 되찾아야 한다고 믿는 그이기에 그 싸움을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그 싸움에 그의 힘은 기성권력에 대한 도덕적 우월성이었다. 그것은 명분이고 무기였다.
대통령을 물러난 그에게 가해진 최대의 역습은 그 도덕성의 상실이었다. 매일 매일 숨을 턱턱 막힐 듯 자기의 동지이자 오랜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에게 부도덕의 덧칠이 던져지면서 그는 결국 부엉바위에 올라 희망을 버렸다. 그것은 항복이되 자기 자신에 대한 항복이었다. 더 이상 ‘못해먹겠는’ 삶에 대한 백기투항이었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그가 자신에 대한 희망을 버리면 결국 우리 사회가 또 하나의 희망을 잃게 된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그에게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터럭 하나도 묻지않은 순백의 삶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을 위해 작은 일이라도 성실히 수행하는 그의 삶, 그 자체였다는 것을. 그가 바위 아래로 몸을 던지면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사회가 쌓아온 희망도 같이 추락할 수 있음을 그가 알았더라면, 그에게 알려줬더라면….
이제 부엉바위에 부엉이는 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을 버릴 수 없다. 새로운 ‘바보 노무현’이 나와서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되묻고, 우리 사회의 나갈 길을  다부지게 따져 묻기를 희망한다. 권위에 기대어 빌붙지 않은 채 정말 ‘계급장 떼고’ 씩씩하게 걸어갈 지도자를 희망한다. 그대여 편히 잠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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