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식이 아닌 지혜
학식이 아닌 지혜
  • 김남필 동우
  • 승인 2009.09.29 17:32
  • 호수 12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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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시 가을이다. 비 내린지 한참이 지난 탓인지 하늘은 맑고 푸르지만 숲 속의 잎사귀들은 바슬바슬하다. 늦가뭄으로 어려움을 겪을 이들만 아니라면 오히려 가을의 정취가 싱그럽기만 하다. 다시 오고, 거듭되는 가을이지만 그 봄의 어수선함이나 여름의 축축함, 겨울의 냉정함을 피할 수 있어 좋다.
몽테뉴는 자신의 서재 들보에 57개의 경구(警句)를 새겼다고 한다. “나는 사람이다. 인간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것치고 나에게 낯선 것은 아무것도 없다(알랭 드 보통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재인용).” 테렌티누스의 금언인 이 구절을 몽테뉴 식으로 받아들이자면 절기의 변화 역시 반복의 권태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어디 그러한가. 개울가의 조붓조붓한 조약돌을 보고도 우주의 긴 생명을 예감할 수 있음은 ‘새로움’에 대한 경이가 아니라 ‘거듭됨’을 예사로이 흘리지 않는 감성과 지혜의 결과이며 그런 자세가 바로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기 마련이다.


별 많은 밤
하누바람이 불어서
푸른 감이 떨어진다 개가    는다
(백석의 「청시(靑枾)」전문 )


아직은 이른 가을의 산골. 곡식을 익게 한다는 하늬바람이 불건 만 아직 익지도 못한 감이 나무에서 떨어진다. 여물지 못한 생명의 추락이 시인 白石(백석)에게는 안타까울 수도 있다. 별은 이루지 못한 약속의 잔해라 하던가. 발그레한 주황으로 자라기로 한 약속을 이루지 못하고 떨어지는 푸른 감의 서러움을 시인은 홀로 지켜본다. 그 설움을 개가 짖어 대신 위로하도록 한다. 가을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이처럼 가을의 새로움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안목 때문임을 우리는 시인의 눈을 통해 실감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예리한 지식과 이성으로 만들어진 과학의 힘으로 우리의 삶이 오늘과 같이 부유해 졌지만 여전히 감성과 지혜의 힘이 없이는 결코 우리는 사람으로 바로 설 수 없다. 맑은 하늘을 보며 큰 숨을 들이켜 보고, 시나브로 짧아진 노을의 마감시간을 보며 문득 비감해지기도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허나 그것으로 그치게 하지 말고 오히려 이를 즐기고 누리려는 뜻과 힘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답게 살 힘을 얻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 몽테뉴의 안목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가 교육으로 얻는 지식이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하나는 논리학이나 문법처럼 정해진 틀과 전해 내려온 내용을 체계화시킨 것으로 이를 학식이라 한다. 또 하나는 우리의 난해한 삶 속에서 행복과 도덕을 증진하는데 기여하는 폭넓은 지식으로 이를 바로 ‘지혜’라 구분한다. 이미 4백여년 전에 몽테뉴는 교육이 모름지기 학식이 아닌 지혜를 키우는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 바 있다.

그러니 우리는 되돌아 보아야 할 일이다. 우리가 대학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들이 그저 학식의 주고받음에 그치는지 아니면 행복을 향한 지혜의 힘을 길러나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지금 그대의 책상과 가방을 둘러보자. 월급과 학점에 관여치 않는 그대의 감성과 지혜를 밝혀줄 책 한권 쯤 읽고 있는지. 이 가을, 선듯한 바람결에 기대어 읽고 생각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대학에 있는가. 

 

김남필 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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