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경대] 노교수에게 배우는 ‘느림의 미학’
[화경대] 노교수에게 배우는 ‘느림의 미학’
  • 장현철 동우
  • 승인 2009.11.06 17:38
  • 호수 126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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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추구하고 살 것인가. 아마도 이상적인 것이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삶이 아닐까. 물이 바위를 만나면 몸을 비켜 고요와 평화를 추구하듯이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면서 치우침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회한이 없을 듯 싶다.


몇일 전 참석한 출판기념회 주인공인 한 노교수는 ‘상선약수’의 삶을 실천하는 분이다. 마치 산속의 맑고 투명한 시냇물처럼 '느림의 미학'(Slow Life)을 증거하고 있다. 위만 보고 빨리 달렸다면 이젠 천천히 걸어보자는 쉽고 간명한 메시지가 그 분의 삶 전체에 녹아 있었다.


그분을 다시 뵌 계기는 ‘출판기념회’였다. 출판기념회는 공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20년전 ‘동고동락’하던 제자들이 삼겹살 집에 모여 소주잔을 기울이며 지나간 시절을 회고하고 반추하는 그런 시간이었다. 거창하지 않고 소박했기에 더욱 정겨웠다. 참석자들은 술 보다 주인공의 향취에 취하여 끊임 없이 소주잔을 주고 받았다.


주인공은 강원 진부로 삶의 거처를 옮기고 ‘무위자연’의 삶을 살고 있다. 매일 아침 ‘영어성경’을 읽으며 ‘생각의 늙음’을 경계하고, 적막한 밤 하늘의 별을 헤면서 산촌의 이웃들과 함께하는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세파에 찌들고 ‘장삼이사’의 행렬에도 끼지 못한 불추한 제자들은 ‘부끄러움과 부러움’이 엇갈렸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 머리 맡에서 마주한 주인공의 책<나 이제 청산으로 돌아가네>은 더욱 큰 울림으로 남았다. 꾸밈 없고 화장기 없는 표지와 제목이었지만, 책 곳곳에는 삶의 정수가 가득 묻어 있었다. 여느 유명인의 자서전 보다 깊은 성찰과 사색의 흔적이 가득했다.


학창시절에도 그렇듯이 그분은 여전히 총명하지만 어리숙하게 살아가는 ‘난득호도’(難得糊塗)의 경지에 도전하고 있다. 한때는 정부기관에서 국제문제 전문가로 날카로운 분석력과 글 솜씨로 이름을 날렸지만, 겉 모습은 투박한 농부와 같이 꾸밈이 없다.  80년대 학생운동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때도 ‘동맹휴업’을 주장하던 운동권과 맞서 단 한번의 결강이나 휴강 없이 버텨 낸 결기의 소유자이지만 큰 소리 한번 내지 않고, 누구든지 처음보면 경계심을 풀게 만드는 ‘부드러운 내공’을 선보인다.


20년 전 남한강 기슭에 처음 장만했던 이른바 그의 ‘전원주택’을 방문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전원주택은 7평 남짓한 크기에 그야말로 책상과 이부자리만 오붓하게 자리한 오두막이었다. 난생 처음 교수님의 전원주택 구경길에 나섰던 필자는 전원주택과 너무도 거리 가 먼 ‘노교수 산방’의 단초로움에 놀랐다.그 때까지 못버리던 교수직에 대한 뜻 모를 경계심과 거리감을 단번에 풀어 버릴 수 있었다. 


그 다음 객지에서 찾아온 근엄한 교수를 스스럼 없이 대하는 이웃주민들의 사사로움이 눈에 들어왔다. 현지 주민들과 그는 일심동체였고 동네의 평범한 주민중의 한명이었다. 무엇하나 특별한 것이 없이 자연스러웠다. ‘소유’보다 ‘존재’를 중시하고 높고 낮음 없이 모든 것이 ‘무등’(無等)인 그의 세계관이 빚어낸 풍경이었다.    


그런 무소유의 정신으로 일관하니, 그의 고백처럼 ‘앞산도 바라보는 내가 임자요, 뒷산도 나 혼자 오르내리락하니 내가 주인’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나만의 청한과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는 뜻을 이루어 청정한 숲과 맑은 한강의 물을 내려다보는 ‘배산임수’에 터전을 잡고 유유자적의 삶을 살아가는 노교수의 ‘아름다운 황혼’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평범하지만, 누구도 쉽게 이루기 어려운 일이다. 노교수의 지혜와 '낮은데로 흘러가며 공덕'을 쌓은 댓가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훌륭한 스승 밑에서 더 배우고 익히지 않아 결국 ‘왕대 밭에서 쑥대가 나와 버린’ 제자의 무능과 비천함이 자뭇 아쉽고 한탄스러울 뿐이다.  

장현철 동우 (사단법인 한국농어촌복지연구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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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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