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칼럼] 틈새가 곧 길이다
[동문칼럼] 틈새가 곧 길이다
  • 최수웅(국어국문·99졸) 동문
  • 승인 2009.11.11 14:16
  • 호수 126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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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콘텐츠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렇게 내 전공을 소개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곤 했다. 그게 뭐하는 건데?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끝없이 이어지는 공부 그 자체보다, 막연하고 불확실한 미래보다, 내 일을 설명하는 것이 더 곤혹스러웠다. 애써 이해시킨다고 해도 이단이나 변절자 취급당하기 십상이었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심각한 표정과 진심어린 목소리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 따라가렴. 네가 가려는 건 올바른 길이 아니야. 자꾸 쓸모없는 일에 눈길 돌리고, 중요하지 않은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전통과 체계가 닦아놓은 길에서 벗어나 구석으로 향하면, 너는 끝내 낙오해버릴 거야.
사람에 따라 억양과 수사는 달랐지만, 충고의 내용은 한결 같았다. 더구나 그 말은 익숙하기까지 했다. 꿈이나 재능 따위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점수에 맞춰 대학 가라던 담임선생, 복종이야말로 최고의 미덕이자 최선의 생존전략이라던 선임하사, 대세에 따르는 것이 가장 옳은 결정이고 무사안일은 직장인의 미덕이라던 첫 직장의 과장까지,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줄을 맞춰 같은 목표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전진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들에 의해, 그리고 그들처럼, 규격화된 부속품 따위는 되기 싫었다. 주인이 되고 싶었다. 만들어진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 힘으로 길을 만들고 싶었다.


모색과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나는 대오에서 이탈했다. 결행은 결심보다 어렵지 않았다. 이리저리 귀찮은 일도 있었지만, 귀 닫고 고개만 끄덕이면 대부분 넘어갈 수 있었다. 애당초 자기희생을 동반하지 않는 충고의 가치는 딱 그 정도에 불과했다. 그들의 걱정은 진심이고 선량했지만, 그렇다고 내 몫의 짐까지 대신 짊어질 수야 없었다.


스스로 길을 만드는 자들의 가장 큰 어려움은, 핑계를 댈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지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고통을 혼자 감내해야 한다. 응석 따위 통하지 않는다. 나태하거나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바로 손가락질과 비웃음이 쏟아진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책임과 고통과 외로움이 큰 만큼, 성장속가 매우 빠르다는 사실이었다. 무모하다는 빈정거림을 받으면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경쟁하고 실행했다.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과 가치를 이용만 하려는 사람, 이들 모두와 논쟁을 거듭했다. 몇 차례 성공했지만 실패한 경우가 더 많았다. 영광보다 상처가 더 많이 쌓였다. 자꾸 코너로 몰렸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틈새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대중문화를 떳떳하게 향유하는 움직임이 일었고, 이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늘었으며, 문화콘텐츠가 국가 동력산업으로 주목받으면서 그에 대한 수요도 급증했다. 이제 문화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은 학문의 한 분야로, 연구대상으로, 창작활동으로 당당히 대접받고 있다. 코너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곳에서부터 새로운 길이 시작된 것이다.


물론 혼자 힘으로 이룬 것은 아니다. 제자의 객기를 호의로 지켜주신 선생님들, 믿음과 동질감으로 서로를 지켜주던 동료들, 그리고 관련 분야에서 새 길을 만들려고 모력한 모든 이들이 있었기에, 시대를 선도하는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졌다.


가끔, 후배들이 찾아와 같은 길을 가고 싶다 말한다. 그러면 나는 되묻는다. 길을 만들 자신이 있냐고, 다른 이들의 충고보다 스스로 자라는 소리에만 귀 기울이며 뚜벅뚜벅 걸어갈 자신이 있냐고. 만일 그러하다면, 나의 길이 아니라 너희들만의 새로운 틈새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최수웅(국어국문·99졸) 동문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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