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빙간’의 숨은 뜻
‘혼빙간’의 숨은 뜻
  • 김남필 동우
  • 승인 2009.12.01 19:09
  • 호수 126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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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사회가 하나의 체제로 굳어지면서 인간의 생활양식 역시 생산성 향상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구속장치들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 흐름은 18세기들어 학문의 힘을 빌려 더욱 강고해진다. 남자는 가능한한 가정문제에서 해방되어야 하고, 육아는 여성의 몫이며 명예와 출세, 경제와 생산이 남성의 본질적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시련을 이겨내며 유혹에 강해야 하고, 탁월한 도덕성을 갖추는 것이 남성의 책무이자 본질로 규정되었다.

여성은 그 반대의 위치와 기능을 떠맡았다. ‘남자답지 못한 유형’이 곧 여성성의 본질인양 강요되었다. 그 속에는 여자는 도덕적 타락에 쉽게 유혹되며 정신적, 육체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존재라는 ‘미신’과도 같은 시각이 존재하고 있다. 남성의 반대가 여성으로 규정되는 ‘대립유형(Counter­Type)’식 논리는 이후 우리의 일상 생활을 지배하고 있다. 인간의 속성을 이처럼 이분법으로 양단하는 사고방식은 사실 플라톤이 인간을 ‘육체와 정신’으로 분리하여 규정하는 것을 답습한 정신사의 유산이기도 하다(조이한, 『그림에 갇힌 남자』참고).

이같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이분법적, 대립적 구분방식은 의외로 우리의 생활양식을 정밀하게 구속하고 있다. 지난 26일 헌법재판소가 ‘혼인 빙자 간음죄’가 남녀평등을 지향하는 헌법에 위배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은 뒤늦은 결정이지만 바로 남성과 여성의 역설적 차별을 인정하는 법적 모순을 개선했다는 점에서 적극 환영할만한 일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사랑한다, 결혼하자’는 말을 하고 섹스를 하는 순간부터 국가권력이 그 정당성을 보장(지키지 못하면 형법에 저촉되니까)한다는 것은 참으로 넌센스이고 코메디같은 일이다.
성인 남녀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이미 육체와 정신을 함께 나눌 가능성이 열려있음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역설적으로 결혼하지 못할 거면 ‘플라토닉 러브’만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셈이니 결국 위선을 부추기는 셈은 아니었는지 새삼 희극적이기까지 하다.

다른 한편으로 이번 판결의 이면에 우리는 여전히 살아 숨쉬는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대립유형’식 편견의 힘을 실감할 수 있기도 하다. 여성은 남성의 유혹에 약하기 마련이고, 결혼같은 미끼에 도덕적으로 취약하다는 시각, 남성은 언제나 강한 도덕적 책무를 져야하고 그렇지 못하면 사회에 낙오시킨다는 체제의 위협. 이런 편견이 확대될 때 우리는 인종차별의 유혹에 빠지며 장애를 업보의 결과로 낙인찍는 우행을 서슴지 않게 된다. 역사적으로 나찌즘이 600만명의 유태인을 학살하면서 내세웠던 것도 바로 게르만족의 ‘대립유형’으로 유태인종을 설정하는 논리가 그 출발이 아니었던가. 도덕이 이성의 근거를 잃으면 그때부터 그 도덕은 폭력과 허위, 자기기만의 칼로 탈바꿈하기 마련이다.

반세기동안 유지된 ‘혼빙간’의 위선을 떨쳐내면서 우리는 우선 자기 자신의 내면을 성찰해 볼 일이다. 빨래하는 남자나 전투기를 모는 여자가 상식이듯이 남자가 되고픈 여자도, 여자가 되고픈 남자도 시민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피부와 성적 취향, 신체와 이념의 ‘남다름’이 고민의 원인은 될 수 있지만 차별과 배척의 대상이 돼서는 안될 것이다. 세상은 도덕적 흑백론으로 재단하기에는 너무 다양하고, 그 다양성과의 공존이야 말로 바로 우리가 인간이기에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증거이니까.

김남필 동우
김남필 동우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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