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외조부 홍봉한에게 올리는 편지
(37)외조부 홍봉한에게 올리는 편지
  • 김문식(사학) 교수
  • 승인 2010.03.18 18:34
  • 호수 126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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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감한 시기에도 형제애를 지키려했던 정조, 당파 싸움에 희생 된 아우시신 수습

 

요즘에 기거하심이 어떻습니까? 눈병은 근래에 차도가 있으십니까? 외손(外孫)은 타고난 운명이 기구하여 만 리 바다 밖에 있는 아우의 부음(訃音)을 들었습니다. 애통함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스스로 억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굽이치는 파도가 멀리 광활하고 높은 산은 아득히 멀어, 바쁘게 달려가 널을 만지고 통곡하면서 형제의 정을 펼 길이 없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게다가 아우를 잃어버린 후 형제들이 더욱 드물어졌으므로, 옛 일을 생각하며 지금의 일을 슬퍼하매 가슴앓이가 더욱 심해져 주르르 흐르는 눈물을 어쩌지 못하겠습니다.
그저께 광은(光恩)이 와서 ‘제주(濟州)에 사람을 보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삼가하고 두려워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지만, 외손의 생각에는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아, 얻기 어려운 것이 형제이고,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윤리입니다. 지금 사람을 보내려는 것은 실로 그만둘 수 없는 정리(情理)에서 나온 것인데, 성인(聖人)은 인륜이 지극한 곳이므로 비록 국왕을 번거롭게 하더라도 어찌 굽어 살피시는 도리가 없겠습니까? 또한 죄명(罪名)은 죄명이고 은애(恩愛)는 은애입니다. 성상께서 이미 불쌍하게 여기시는 하교가 있었는데, 외손(外孫)이 어찌 형제간의 친분을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가 죽은 것이 제주도라 느끼는 감정이 남다른데, 외손이 만일 돌봐주지 않으면 이 어찌 인정상 차마 할 일이겠습니까? 인정상 차마 할 수 없는 일인데 스스로 본래의 인애(仁愛)를 막아버린다면 또 어찌 도리상 편안하겠습니까? 외손의 얕은 생각은 이런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조의 외조부인 홍봉한의 초상화.

정조가 세손으로 있던 1771년에 작성한 글인데, 원제목은 ‘홍 봉조하에게 답함(答洪奉朝賀)’이다. 봉조하(奉朝賀)는 퇴임한 고위 관리를 예우하려고 내리는 벼슬인데, 맡은 직무는 없으면서 평생토록 녹봉을 받을 수 있었다. 홍 봉조하는 혜경궁 홍씨의 부친이자 정조의 외조부인 홍봉한(洪鳳漢)을 말하는데, 정조가 자신을 외손이라 표현한 것은 편지를 받는 사람이 외조부이기 때문이다.


정조의 아우인 이인(은언군)과 이진(은신군)은 당파 싸움에 휘말려 제주도로 유배되었는데, 신체가 허약하던 이진이 제주도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의 나이는 17세 때의 일이다. 이 소식을 들은 정조는 즉시 사람을 제주도로 보내어 아우의 시신을 수습하려고 했는데, 문제는 이진을 제주도로 유배시켜 죽게 한 사람이 할아버지 영조라는 사실이었다. 홍봉한은 제주도로 사람 보내는 것을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당부했는데, 혹시나 영조의 노여움을 사게 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홍봉한의 우려를 정조에게 전해 준 광은(光恩)이라는 사람은 김두성(金斗性)을 말하는데, 그는 정조의 누이인 청연군주의 남편이므로 정조와는 처남 매부 사이였다.


외조부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행동을 조심하라고 당부했지만, 이에 대한 정조의 생각은 확고했다. 아우가 비록 죄를 얻어 사망했지만 자신과는 엄연히 형제이고, 형제간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 또한 아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특별한데 그를 위해 아무 것도 해주지 않는다면 자기 스스로가 불편해진다. 영조도 마침 어린 손자의 죽음을 불쌍하게 여기므로, 아우의 시신을 수습하겠다는 자신의 요청을 들어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정조의 판단이었다. 편지를 보면 정조는 정중하게 외조부의 의향을 여쭈었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결심한 바를 외조부에게 알리고 있다.


아우의 시신이 서울에 도착하자 정조는 특별히 그를 위해 제문을 지었다.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형제애를 거론하고 타지에서 요절한 아우의 죽음을 슬퍼하는 내용이었다. 정조는 아우를 깊이 사랑하여 그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김문식(사학) 교수
김문식(사학) 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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