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갑의 시사터치
조영갑의 시사터치
  • 조영갑
  • 승인 2010.03.23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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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세스쿠와 낙태

차우세스쿠와 낙태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는 조국을 강대국으로 만들고 싶었다. 농업중심의 후진국을 공업국가로 변모시키고 군사력을 확충해 동유럽의 맹주가 되려는 ‘거대한 그림’을 그렸다. 차우세스쿠는 그 해답을 ‘인구’에서 찾으려 했다. 인구를 늘리면 국력은 자연스레 상승한다는 생각이었다. 강력한 인구증가 정책이 시행됐다. 이혼이 금지되고 여성들은 최소한 네 명의 자녀를 출산해야 했다. 여성들은 피임기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부인과 검사를 받아야 했다. 낙태는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한 가정에 적게는 4명, 많게는 10명 이상의 아이들이 태어나자 빈곤층 부모들은 아이들을 갖다버리기 시작했다. 실업률이 높은 당시로서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졸지에 고아가 된 아이들은 부랑아로 전전하며 사회의 골칫거리로 전락한다. 약 10만 정도로 추산되는 ‘차우세스쿠 아이들’의 모습이다. 약물에 취해 거리에서 구걸하는 잉여인간들. 출산을 강제하면서도 육아의 여건을 만드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독재정권의 무지가 만들어 낸 비극이었다.

1960-70년대 산업화를 거치면서 대한민국 역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강제적인 조치는 없었지만 다양한 캠페인과 유인책이 시행된다.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정부는 낙태를 법으로 금지 시켰다. 이렇게 늘어난 인구는 산업입국의 초석을 닦는 데 알뜰하게 동원되었다. 불어난 인구가 부담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들어서다. 정부는 ‘삼천리는 초만원’이라며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낙태 금지법이 유명무실하게 된 것도 이 시기다. 실정법이 사문화되면서 낙태는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한해 150만 건에 이를 만큼 낙태시술이 성행했다. ‘인구억제 드라이브’는 효과를 거둬 한국은 단시간 내에 세계 최저 출산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낙태에 대한 한국정부의 정책은 그때그때 다르다. 산업화가 한창일 때 정부는 낙태를 노동력을 없애는 ‘비애국’으로 간주해 엄격하게 금지했다. 그러나 국토의 효율성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낙태시술의 문턱은 대폭 낮아졌다. 이제 저출산이 문제가 되자 낙태금지법을 강하게 적용할 태세다. 태아를 생명으로 취급하기보다 인적자원으로 물화(物化)시켜 온 결과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낙태를 강력하게 금지하는 조치를 취한다면 부작용이 클 수밖에 없다. 항상 존재하는 수요는 어떤 방법으로든 공급자를 찾게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불법시술이 늘어나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이른바 풍선효과다. 해마다 전세계적으로 200만건의 불법시술이 행해지는데 이 가운데서 약 7만명의 여성이 사망한다고 한다.(IPPF)

양지로 유도해 국가가 철저하게 관리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79년도에 낙태를 합법화한 프랑스는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낙태수술이 대폭 감소하는 것은 물론, 불법시술로 인한 피해도 사라졌다. 더불어 실시한 출산, 양육보조금 정책으로 저출산 탈출의 모범국가가 되었다. 미국과 일본 역시 합법화로 돌아선 이후 낙태시술이 감소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낙태를 억누를 것이 아니라 출산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육아복지에 힘쓴다면 낙태는 줄 것이고, 출산은 늘어날 것이다.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다. 책임질 수 없는 아이들을 양산해 내는 것은 부모에게도 당사자인 아이들에게도 평생의 멍에가 될 것이다. 이미 우리는 17만명에 이르는 ‘한국의 아이들’을 해외로 수출한 전력이 있다. 1989년 루마니아에서 차우세스쿠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정부가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낙태 합법화였다.

조영갑 (언론홍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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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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