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갑의 시사터치
조영갑의 시사터치
  • 조영갑
  • 승인 2010.04.07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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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한주호, 군인 전두환

군인 한주호, 군인 전두환

나는 전두환에게 나쁜 기억이 없다. 나는 그가 집권한 1980년에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거니와, 세상을 알 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역사의 죄인’이 되어있었다. 이런 이유로 1980년대 학번들이 ‘광주’와 ‘전두환’을 함께 떠올리며 느꼈던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격정’을 나는 알 리가 없고, 96년 수의를 입고 법정에 나타난 그를 보며 느꼈을 ‘카타르시스’에 닿을 길이 없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를 기록한 역사를 안다. 그리고 그 역사가 부끄러운 사실에 바탕하고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전두환, 그는 누구인가.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가 살해되자,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수사를 지휘하면서 정국의 중심인물로 부상한다. 그때 그의 계급은 소장(별 두 개)였다. 상관이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대장(별 네 개)은 ‘강성’ 전두환이 맘에 차지 않았다. 수사 곳곳에서 이견을 드러냈다. 통제가 되지 않는 부하를 해임하려 한 정승화는 역공을 당한다.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에 의해 강제로 연행된 것이다. 이른바 12.12사태다. 명분은 ‘원흉’ 김재규와 공모했다는 것. 이 과정에서 공관 경비 병력인 장교 1명과 사병 2명이 사살된다. 또, 보안사령부 분실에 감금한 정총장에게 물고문을 가하며 겁박한다.(박원순, 『야만시대의 기록』) 상관에 대한 초법적인 하극상과 부하 살해의 총 책임자. 군인 전두환의 모습이다.

전두환, 그는 누구인가. 순식간에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은 정권을 접수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민주인사들을 구금하고 계엄령을 확대해 정치활동을 금지한다. 전국의 대학교에 계엄군을 상주시켰다. 사단은 광주에서 났다. 학생들의 데모를 계엄군이 진압하자 시내 전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된 것이다. 전두환은 서울에서 11공수여단을 파견해 암호명 ‘화려한 휴가’ 작전을 감행한다. 5월 18일 최초의 발포로 희생자가 나오고 27일에는 시민군의 본거지인 전남도청을 완전히 ‘탈환’한다. 이때 도청에 투입된 계엄군 병력만 6,168명. 우리가 익히 들어온 광주 민주화항쟁의 모습이다. 2001년 정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민간인 168명, 군인 23명, 경찰 4명 등 195명이 사망하고, 4,782명이 부상했다. 행방불명자만 406명이 신청되었다. 국민의 안위를 보호한다는 국군. 1980년 5월 광주 땅에는 ‘국민’이 없었다. 전두환은 국군을 살상병기로 사용(私用)했다. 그렇게 군인 전두환은 대통령이 되었다.

지난 3일 故 한주호 준위의 영결식장. 귀빈석에 앉아있다 침통한 표정으로 한 준위의 영정에 헌화한 사람이 있었다. ‘전직 대통령’ 전두환. 그 짧은 장면을 본 내 머리엔 갖가지 형용모순이 떠올랐다. 아름답고 추한, 고귀하고 저속한, 당당하고 부끄러운…. 국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몸을 버린 故 한주호 준위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국군의 명예를 저버린 예비역 대장 전두환은 형용모순만큼이나 강렬한 대비였다. 그러나 그 모순은 어쩌면 한국군의 역사를 응축해 보여주는 장면일지도 모른다. 살신성인의 ‘영웅’들과 그런 그들을 이용해 권력욕을 채우려는 ‘간웅(奸雄)’ 사이의 길항의 역사 말이다. 전두환 그는 누구인가. 군인 전두환이 사라져야 한 준위는 온전히 영웅일 수 있다. 명예롭게 가고 싶다던 한 준위는 전두환의 국화를 받아들고 명예로운 길을 갔을까? 모를 일이다. 

조영갑(언론홍보 4)

조영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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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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