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갑의 시사터치
조영갑의 시사터치
  • 조영갑
  • 승인 2010.05.18 13: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0년 광주와 이종범, 김대중


친구놈은 광주 토박이다. ‘해태의 호랑이’들이 한국 야구판을 포식하고 담배 태우던 시절, 그의 꿈은 ‘이종범’이 되는 거였다. 97년, 호랑이들은 90년대의 마지막 우승을 하고 긴 침묵에 빠져든다. 그 해 친구의 꿈도 바뀐다. 친구는 ‘김대중’을 꿈꾸기 시작 했다. 질곡 많았던 DJ가 전라도 일대에 풍악을 울렸다.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그 친구는 틈날 때마다 서울의 친구들에게 야구장의 정경을 그려 내보였다. “아따, 장난 아니었당께~ 7회쯤 넘어가면 관중들이 전부 일어나서 ‘비 내리는 호남선’을 부르다가, ‘선동렬, 김성한’을 외쳐야. 그러다가 마지막엔 ‘김대중’을 외친다고.” 나는 진심으로 그가 부러웠다.

광주 사람들이 야구장에서 ‘애먼’ 김대중을 찾는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머리가 굵어진 후였다. 그들은 야구를 단지 야구로 여기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해태 타이거즈는 단순한 야구팀이 아니었다. 야구장은 그들에게 5.18의 ‘씻김굿판’이었고, 해태의 선수들은 망령의 땅에 강림한 신들린 무당이었다. 경상도와 서울에서 온 팀들을 박살낼 때, 해태의 열혈팬들은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야구장에서 ‘서러운’ 환호를 질러댔다. 광주의 해태는, 일테면 카탈루냐의 바르샤(FC 바르셀로나)와 같은 의미였을 것이다. 프랑코에 맞서 끝까지 저항한 ‘카탈루냐의 정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친구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종범과 김대중을 꿈꾼 녀석은 응당 5·18의 정신을 계승해야 옳았다.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산화한 시민군을, 그들을 낳은 광주를, 전라도를 자랑스럽게 가슴에 달고 다녀야 했다. 그래야 옳았다. 그런데 그는 80년의 광주에 대해 말하길 꺼렸다. 비판했다. 부정했다. 녀석만큼은 광주의 저항정신을 DNA 깊숙이 새기고 있을 거라 믿었던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술자리에서 우리는 자주 싸웠다. 공격의 포문은 언제나 내가 열었다.

“80년 광주는 여울목이라고. 한국인의 역사인식 저류에 도도하게 흐르는 저항정신이 모여드는 여울목 말이다. 그런데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안되지. 뭐라고? 역사가 이어지는 과정에서 한번쯤 겪는 필연적인 일이라고? 그런데 ‘하필이면’ 광주 땅에서 벌어진 일이라 더 특별하게 된 거라고? …… 그래, 그럴수도 있겠지. 그런데 확실한 건, 그 필연적인 일에 수백명의 피가 뿌려졌고, ‘하필이면’ 광주였기 때문에 진압군이 더 악랄할 수 있었다는 거다. 말하자면 광주가 전두환식 공포통치의 시범케이스로 지목됐다는 거라고. …… 그런데 뭐? ‘광주’라는 건 우연일 수 있다고? 야 이 XXX아, 넌 어디가서 광주놈이라고 말하지 마”

나의 어쭙잖은 일장 연설은 항상 친구의 침묵으로 힘이 빠지곤 했다. 논리의 일관성도, 계통도 없는 ‘광주 담론’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조금 더 머리가 굵어진 지금은 알 것 같다. 그 친구는 5.18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의연해 지고 싶어 한 거라고. 광주를 자랑스러워하지 않은 게 아니라, 광주를 성역화해 과실을 따먹으려는 ‘지역 정치꾼’에 반대한 거라고. 친구가 진정 되고 싶은 것은 전라도 광주의 이종범, 김대중이 아니라 ‘한국의 이종범, 김대중’이었다고. 그 친구가 일깨워 준 것은 이거다. 5월 18일은 광주의 날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날’이라는 사실 말이다.

조영갑 (언론홍보·4)

조영갑
조영갑

 dkdds@dankook.ac.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