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용산 ‘두리반’에 거는 기대
작은 용산 ‘두리반’에 거는 기대
  • 이민호 기자
  • 승인 2010.05.20 16:36
  • 호수 1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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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20대는 과거 투쟁의 주역에서 ‘투정’의 주역으로 전락해버린 것일까? 20대를 오직 ‘스펙 쌓기’에 열을 올리는 자기애만 강한 이기적 존재로 낙인찍어 버린 기성세대의 의식 속에서는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되레 질문을 던져본다. 기성세대들이 사태를 방관하고 있었던 ‘효순이, 미선이 사건’ 때 촛불집회를 주도 했던 당시 10대는 지금의 20대가 아니냐고 말이다.

대학은 취업을 위해 잠시 거쳐가는 간이역이 된지 오래고, 이곳에서 기존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함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거기에 더해 대학생들은 기업이 원하는 명품 인재상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고 발버둥치기에 바쁘다. 20대에게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회문제로 눈을 돌릴 실질적 여유는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조건들을 간과하고 기성세대가 20대를 천덕꾸러기라고 비판하는 것은 스스로를 자가당착이라는 구멍 속으로 밀어 넣는 꼴이다. 20대를 철저히 상품화시키고 적자생존의 정글로 깊숙이 밀어 넣은 장본인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와 더불어 20대가 사회에 대한 관심과 비판적 의식을 죄다 놓아버렸다는 기성세대의 일갈에도 동조할 수 없다. 기자는 다만 그런 관심과 의식들이 잠재적으로 숨겨져 있어 그것들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안에 잠재되어 있는 비판의식들이 밖으로 드러날 수 있게 하는 매개가 등장할 경우 과거의 기성세대가 그랬듯이 20대들의 힘이 실질적으로 발현될 것이 분명하다.

이런 점에 있어 작은 용산이라고 불리는 두리반에서의 연이은 농성이 20대의 의식 속에 작은 불꽃을 점화시키는 동기로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는 용산참사의 꽤 두툼한 역사적 기억을 얹고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하나는 두리반 뿐 아니라 제 3의, 제 4의 용산이 곳곳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투쟁을 축제처럼 즐기며 연대하고 있는 이곳이 20대가 재개발과 같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요람이 되길 빈다.

다만 두려운 것은 연대의 끈이 굳건해지기 전에 20대가 이 모든 상황에 익숙해져버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라도 자신의 소리를 내는 사람들에게 재갈을 물리는 이 사회가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정석으로 만들기 전에 연대의 나팔이 널리 울려 퍼졌으면 한다. 더더욱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나팔의 어기찬 소리가 우리 대학 학생들로부터 시작됐으면 하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20대가 내재한 사회에 대한 관심과 비판의식을 무시하는 기성세대에게 기자가 좋아하는 가네코 미스즈의 ‘별과 민들레’라는 시를 소개한다. 후반부만 인용해보겠다. “지느라 시든 민들레는/ 기왓장 틈에서 말이 없어도/봄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강한 저 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아/보이지 않아도 있는 거예요/보이지 않는 것도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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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ksdlal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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