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는 보배가 없고 다만 가토의 머리를 보배로 여긴다
『분충서난록』은 유정의 5세 제자인 남붕(南鵬) 스님이 모은 유정의 유고(遺稿)가 모태가 되었다. 김재로(1682~1759)의 서문에 의하면, 내용에 맞게 ‘분충서난록’이란 제목을 부치고, 당대에 명문장가로 알려진 신유한에게 부탁하여 유정과 관련된 여러 내용을 보충하여 덧붙이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분충서난록』이 완성되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먼저 김재로와 어유구의 서문이 있고, 그 다음에 유정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본문이 있다. 이 내용은 사명대사가 직접 쓴 것으로 그의 활약상이 잘 나타나 있다. 즉 선조 27년(1594) 4월과 7월, 12월에 가토 기요마사의 진영에 들어가 담판한 내용과 적정의 허실을 상세히 기록한 「청정영중탐정기(淸正營中探情記)」 3편이 있고, 중국 사신에게 자신이 알아낸 적진 정보를 술회한 글이 기록되어 있다. 이어 2편의 상소문이 있다. 유정은 1594년과 1595년에 선조에게 상소를 올려 전쟁 중이라도 백성 보호에 힘써야 함을 역설했다. 그리고 국난 극복의 방안으로 인물 본위로 인재를 선발하고 비록 천한 자라도 역량이 있으면 뽑아 쓸 것, 산성을 수축하고 군량과 무기를 비축할 것, 장수를 신중히 임명할 것 등을 선조에게 간언하였다. 상소문에 이어 일본 승려에게 보낸 편지글이 실려 있다. 그 다음으로는 신유한이 유정과 관련된 기록을 발췌하여 실었는데 이수광의 『지봉유설』, 유몽인의 『우야담』, 홍만종의 『순오지』 등에 실린 것을 첨부하였다. 그리고 책 말미에는 신유한의 발문이 있다.
한편 김재로는 서문에서 유정에 대해, “불교에서는 임금과 어버이를 버리고 세상 밖의 예(禮)를 숭상하니 유가(儒家)에서 매우 싫어하고 힘써 배격한다. 그러나 스님은 한낱 승려로서 무리를 이끌고 적을 토벌하였으며, 임금의 뜻을 받들어 적진에 들어가 그 허실을 남김없이 알아내었다. 또한 전란이 겨우 진정되자 임금의 명을 받들어 교만한 오랑캐를 제압하고 나라를 평안케 하였으니, 그 충성과 공로가 어찌 심히 위대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며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이어서, “귀국에는 어떤 보배가 있느냐는 가토(加藤淸正)의 물음에 스님은, ‘우리나라에는 보배가 없고 다만 장군(가토)의 머리를 보배로 여긴다’고 대답하였으니, 가토로 하여금 머리 숙여 공경하고 탄복하면서 마침내 감히 칼을 빼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여 적진에 들어가서도 기개 넘친 유정의 모습을 칭송하였다. 유정이 보여준 외교 담판의 담대함, 적 정세의 간파, 예방적 국방 강화 등은 오늘날에도 매우 유효한 전란 대비책이라고 할 것이다.
김철웅(동양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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