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볼펜] 엉엉엉
[백색볼펜] 엉엉엉
  • 김상천 기자
  • 승인 2012.03.13 23:57
  • 호수 13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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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중요한 건 따로 있구나

◇ 1라운드에서 나는 무참히 깨졌다. 얻어맞았다. 그래서 잠시 링 위에 누워있다. 하지만 의식은 잃지 않았다. 심판이 세는 카운트는 똑똑히 듣고 있다. 나는 아직 누워있다. 나는 다시 일어났을 때를 위해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 카운트가 텐에 다다르기 전에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나는 바닥에 드러누워 이 패배감을 가장 깊은 밑바닥까지 음미하기로 결정했다. 속이 갈가리 찢기고 창자에 검은 얼룩이 질 때까지 곱씹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2라운드 뛸 준비를 마칠 것이다.

◇ 오 이런 세상에. 2009년 12월 15일. 그러니까 원하던 대학에 다 떨어지고 우리 대학과 국민대학교 두 군데서만 합격통지를 받던 날 썼던 일기의 마지막 부분이다. 엉엉엉. 타이슨한테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그땐 그랬다. 단국대라니. 나는 훨씬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 사람인데. 지난 1년 간 하루 8시간 일하고 8시간 공부하고 6시간 자면서 가고도 남을 만한 노력을 했는데. 많은 기타 등등 찌질이들이 나보다 더 좋은 대학에 붙었는데, 이럴 수가…. 다시 해보자. 편입 공부를 하자…. 그땐 정말 그랬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창자에 검은 얼룩’이라니. 지금 다시 읽으려니까 창자(유문에서 항문에 이르기까지의 소화관을 말하는 거라더군) 대신 코가 방귀를 낀다. 힝 창피해.

◇ 지금은 잘못하면 콧물이 나올 만큼 세게 콧방귀를 끼게 되지만 저때는 심각했다. 믿기지 않고, 분하고, 이해할 수 없었다. 단국대 정도면 그래도 괜찮지, 하면서도 엉엉엉. 그런 상태로 신문사에 들어왔다. 금방 이곳이 한번 들어오면 빠져나갈 수 없는 파리지옥임을 깨닫게 되고, 꾸역꾸역 신문을 내면서 고마운 사람들과 부대끼는 사이 나는 자연히 알게 됐다. 아 중요한 건 따로 있구나. 이후 전국 100위권 대학 학생들과 정기적으로 만나게 되면서 또 알았다. 오호라 대학들이 다 거기서 거기구나.

◇ 그보다, 제정신을 찾았다. 학벌이라는 게 별로 신경 쓸 만한 게 아니라는 걸, 저때는 잊고 있었다. 고졸이건 대졸이건 사람은 저마다의 냄새와 저마다의 빛깔이 있었다. 학벌은 충혈된 눈으로 볼 때나 신경이 쓰인다. 학벌을 누군가를 평가하는 지표로 삼기에는 내 자신이 너무 불쌍하다. 나는 오감으로 사람을 파악할 것이다. 취업을 염두에 두더라도 단국대학교라는 간판이 큰 손해를 끼치진 않는다. 연고대만 못한 건 맞지만 얼마든지 다른 걸로 메울 수 있는 차이다. 충혈된 눈에 안약이 한 방울 떨어진 것처럼, 엉엉엉 울던 신입생은 지금 삼학년이 돼서 밝아졌다. 대학생활에 만족한다. 우리 대학에 잘 왔다고 생각한다.  

 <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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